요가아로마테라피

아로마테라피의역사

영암스님 2008. 4. 3. 21:39

 역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아로마테라피의 역사를 보는 듯합니다. 아로마테라피도 고대 이짚트에서 시작하여 유다를 경유하여 앗시리아, 그리이스, 로마, 아랍,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럽제국, 아시아에 전해져 옵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 기원전 18,000년경에는 사람들이 식물을 약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 고고학자에 의하여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많은 고대 문명에서는 탄생과 동시에 신체에 들어와 죽음과 함께 거두어지는 숨은 신성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숨은 사람의 혼으로 향기가 자연의 혼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향기를 흡입하는 것은 자신의 신체에 우주의 영적인 힘을 끌어들인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또한 하늘에 기도를 올리는 자로써 기도와 함께 신에게 올라가는 연기는 기도가 신에게 도달되는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옛날, 사람은 동물을 관찰하고 식물에 접함으로 자신들의 환경에 대한 지식을 본능적으로 습득했습니다. 처음에는 , 약초, 수지를 그대로 이용했습니다만 수지와 방향수지에 열을 가하여 강한 향을 얻게 됩니다.

 “Perfumes” (라틴어로 연기에 의한이란 의미) 문화적인 고급품 중에서도 매우 귀중한 것을 표현하는 이름의 하나로 알려지게 됩니다.

 고대에는 종교적, 마술적인 의식에 사용된 향기는 천연의 약초, 향신료, 수지로부터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에는 어떤 특정의 천체의 영향을 받은 공통의 에센스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되어 왔습니다. 예를들면, 카모마일과 후란킨센스, 마리골드, 로즈마리에는 태양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신을 진정시키기 위하여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중에서 가장 고가(비싼) 것을 드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방향물질이 동물을 이용한 제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4,000년경에는 세계각지의 사람들이 방향물질과 제조방법을 알게 됩니다. 압착법, 끌여 졸이는 (다림), 건조법, 가루를 만드는 , 지방을 사용한 온침법, 그리고 단순한 형태의 증류법도 고대인은 기술로써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국으로 부터 이집트, 페르시아, 유럽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자기자신과 가지고있는 물품에도 아낌없이 향수를 사용했습니다. 집의 담벽, 배의 돛에까지 향수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향료를 취급하거나 제조하는 일은 명예로운 직업으로 자주 성직자가 취급하였습니다. 실제로 거의 의사와 외의 지식인이 일을 담당하였습니다. 또한 향료 조합은 의학의 일분야였기 때문에 방향수도 함께 제조되어 외용뿐아니라 내복용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수지와 향신료는 국가간에서 귀중한 무역품목으로 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법외의 가격이 붙어있었습니다만 그래도 받아 들여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향수는 단순한 사치품이라기 보다는 신의 고귀함에 가깝게 접근하는 힘을 가진 신비적인 물질이었기 때문입니다.

 유향(후란킨센스 / 올리버넘) 기원전2,000년경 이후 이집트인에 의해 현재의 소마리아 부근에 위치하는 푼토, 아랍남부에서 시작되는 유명한 향료의 경유하여 요르단과 이스라엘을 통하여 수입되었습니다.

 유향 무역의 최성기는 수지의 혼이 다이아몬드와 같이 비쌌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던 고대의 제조공장에서는 노동자는 엄격하게 감시되어 집에 되돌아 갈때는 다년간3,000톤의 향유가 무역상들의 손에 의해 아랍 남부로부터 향료의 길을 통하여 판매되었는데 이것은 놀랄 정도의 이익을 가져오는 무역이었습니다.

 

중국의 영향

기원전 2,650             황제는 주로 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기록한 황제내경이라 불리우는 책을 펴냈으며, 중국인은 이때부터 침을 개발하였습니다.

기원전 1000 – 700 년전      중국인에 의해 편찬된 약용 식물에 관한 가장 오래된 책은 신농이 편찬한 신농본초경입니다. 여기에는 350종류의 약용식물의 일람이 기제되어 있습니다.

 

이집트의 영향

기원전 4,500년이후     이집트인은 세가지의 목적으로 향료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매일의 생활의 일부인 종교상의 의식을 위하여, 시체의 방부처리를 행하기 위하여, 관능적인 기쁨을 얻기위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위생관념이 높고 공을 들여 입욕방법을 개발한 것도 이집트인이었습니다. 로마인은 이것을 이어받아 넓히게 됩니다. 기원전 4,500 당시부터 향유, 수피, 수지, 향신료등이 의료용 또는 화장용으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집트 신전에는 향료의 연구소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이집트인은 고대 세계 전체에 향료의 사용법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1,500년전의 벽화에는 3명의 이집트인 여성이 연회에서 향고(향을 발하는 연고) 사용하는, 청색 수련으로 편안한 수면을 청하는 향을 흡입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에게는 생명이 있는 것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것으로 신성스러운 향의 , 청색 수련이었습니다. 수련은 새벽에 꽃이 피어 낮에는 봉우리의 상태로 수중에 잠겨있다가 다음 아침에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부활, 재생의 상징으로 되어있었습니다.

                         시더웃드는 고대 이집트에서는 불사의 나무 생각되어 안에 시체를 안치하면 사람의 육체가 영원히 보존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시더 오일은 미이라  만들 때에도 시체의 안에 주입되었었습니다. 파라오는 신전의 문을 만들기 위하여 또한 배를 제조하기 위하여 시더웃드를 원하였습니다. 시더웃드는 자주 관으로도 사용되어 지금도 관을 만들때에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향목은 신전의 향으로써 사용되어 오일은 이집트인 사이에서는 최고의 화장품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앗시리아 여인은 시더를 화장품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목재인 사이프레스와 향유를 함께, 가루를 만들어 소량 물에 녹여 섞어서 피부를 유연하게 하는, 달콤한 향기를 가진 연고로써 사용하였습니다.

기원전 2,800          파피루스에 의하면 피라미드를 세운 쿠우왕의 통치 시대부터 약초가 치료에 이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원전 1,700          현존하는 기원전 1,700 당시의 파피루스에 의하면 마늘과 쥬니퍼등의 일반적 약용식물의 많은 것이 4000년에 걸쳐 사용되어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람세스3세의 시대에는 눈의 치료에 대마가 사용되었으며 또한 울고있는 아이를 그치게 하는데 케시의 추출물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1,580     18왕조의 시대에는 이집트의 , 무역 그리고 국력이 증대하여 방향에 관한 지식이 확대되었습니다. 방향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들은 성직자였습니다. 그들은 최초의 조향사이며, 아로마테라피스트라 있습니다.

기원전 1,500     에베루스 파피루스는 20m 되는 두루마리로 거기에는 800종이상의 항목에 걸쳐 주로 약초를 이용한 처방, 치료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아카시아, 코로신도, 나츠메야시의 열매와 꿀을 배합하면 피임의 작용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들이 질내에서 발효하면 정자를 죽이는 작용을 하는 유산을 생성합니다.

                        이집트인이 증류에 대하여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떤지에 대하여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지만 미이라를 만들때에 시더웃드오일을 사용한 것은 여러 기록으로 부터 밝혀져 있습니다. 적어도 목재의 압착에 의한 제조법을 채용했다고 생각됩니다. 대부분의 오일은 방향식물과 수지를 히마시유와 같은 지방유에 침출하는 방법으로 얻었습니다. 약초, 약용식물, 오일, 향신료에 대한 지식은 그리이스와 동방에 전해집니다.        

 

그리이스의 영향

 고대 그리이스인은 대부분의 의학지식을 이집트인으로 부터 얻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그리이스 사이에 무역이 왕성했고, 예를들어 기원전1,240년에 유다인이 약속의 이동과 같은 인적교류가 있음에 따라 그리이스에 의학지식이 전해지게 됩니다. 히포크라테스(기원전468 – 377) 의학적인 지식과 치료의 기초를 쌓았으며 엄밀한 관찰에 의한 치료를 최초의 내과의사였습니다. 히포크라테스는 보다 본질적인 특성인 , 냉함, 건조, 습기에 의한 식물과 약초를 분류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이것들을 좋은 밸런스로 유지시켜 충분한 운동과 신선한 공기를 접하면 좋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매일 아로마 목욕과 향유를 이용한 마사지의 유효성을 믿었습니다.

 히포크라테스는 아테네가 페스트로 일을 당했을 , 거리의 여기저기에서 향목의 거대한 모닥불로 도시를 구합니다. 18세기에도 파리의 거리에서는 전염병의 확대를 막기위하여 쥬니퍼를 태웠습니다.

 지식의 세계가 확대하고 발전함에 의해 문명이 서로 대적하게 됩니다. 로마 제국은 점점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학의 세계에서 지배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그리이스인 이민 의사들과 지식의 탐구자들이었습니다.

  중의 하나가 황제 네로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그리이스인 외과의사였던 디오스코리데스였습니다. 그는 약용식물의 작용 특성과 사용방법, 약초를 언제 채취할 것인가, 어떤 단계에서 사용해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기입한 문헌을 남기고 있습니다. 문헌은 약물지(De Materia Medica) 알려져 있고 에센셜오일 업계에서는 지금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디오스코리데스는 아픔의 치료에 버드나무를 다린 액을 처음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버드나무로 부터는 사리칠산이 얻어지며, 일반인에게는 아스피린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이스인은 신전에서 향료와 오일을 다량으로 사용하였으며 그리이스의 치료의 신인 아이스크러피우스의 신전과 아프로디테의 신전에는 일을 기록한 대리석의 명판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저명한 그리이스인 의사 마레스테우스는 방향식물, 특히 꽃에는 자극 또는 진정작용의 어느 쪽인가를 가지고 있는것을 알아 내었습니다.  ) 장미에는 원기회복의 작용이 있습니다.

 

로마 문명

 기원전150년전후, 로마가 그리이스를 정복했던 , 로마인은 식물의 약효보다도 조리법에 흥미를 가졌습니다. 로마인은 또한 향수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향수를 보관하기 하기위하여 대리석, 마노, 유리제의 (연고병) 사용하였습니다. 향수에는 3종류가 있습니다.

ㄱ)    고형연고 ( 연고 )

ㄴ)    향유

ㄷ)    분말향

 이것들은 화장품과 신체의 마사지, 성식을 위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성서에서는 향유 치료의 힘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로마인은 향목과 약초, 향유의 사용을 제국 전체에 넓혔습니다. 파세리와 휀넬, 라비지등은 로마인에 의하여 영국에 들어오게 되었고, 인간의 신체는 기계와 같이 수리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전개하여 것은 그들이었습니다. 복잡하고 고가로 설정된 약초요법에 의한 의료는 많은 부를 얻게하는 비지네스로 되었습니다.

 또한, 시대에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은 크라우디우스 가레노스 (131 – 199) 였습니다. 그는 중세를 통하여 의학의 권위라고 주목받고 있었고 마르크스 아우레리우스 황제의 궁정의사로 일하였습니다. 그는 약효별로 분류한 식물에 대한 많은 문헌을 남겼습니다.

 

이슬람 문화의 영향

 5세기의 로마 제국 멸망과 함께 1급의 학문의 중심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가레노스, 히포크라테스, 디오스코리데스의 공적은 콘스탄티노플과 페르시아에서 말하여지게 됩니다.

 이런 지식은 아랍인에 의해 광열적으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그들은 약초와 외의 동식물로 만능약을 만들어 치료와 화장에 사용하였습니다. 약초의 배합법과 사용법, 관례는 아랍군의 유럽 침략과 함께 역수입되게 됩니다.

 가장 위대한 의사의 한명으로 아윈센나 (980 – 1,037) 들수 있습니다. 그는 철학, 천문학, 형이상학, 기하학, 의학에 정통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에센셜오일의 증류법은 아윈센나가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연금술의 실험이 왕성히 행하여 , 과정으로 수증기증류법을 발견합니다. 결과 세계의 방향추출물의 무역과 수송이 편하여져 확대됩니다.

 아윈센나는 생애를 통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중에서 의학성전 Cannon of Medicine” 입니다. 저서는 12세기에는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양에 역수입된 의학교의 주요한 교과서가 됩니다. 분말 상태의 유향은 위의 부조를 개선하고 입안에서 씹음으로 이와 잇몸을 세정하고 머리를 맑게 하는 목적으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유향은 가톨릭교회에서 지금도 향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최근 향수로도 13% 유향이 들어있고, 특히 동서풍의 향의 계통에 속하는 향수로 사용됩니다. 수피를 긁으면 유백색의 수액이 나와 공기와 접하면 굳습니다. 수액은 1년중 채취됩니다만 힘든 작업이 필요합니다.

 12세기, 십자군의 많은 기사들이 향유와 향수의 물품 아니라 증류법의 지식도 가지고 되돌아 왔습니다. 유럽인은 유럽에서 손에 넣을 있는 라벤더와 로즈마리, 타임을 사용했습니다.

 6세기부터 14세기의 중세 유럽에서는 의학상의 진보는 별로 없었습니다.

 1492 크리스토퍼 콜럼부스가 신세계(부미대륙) 발을 들여 놓으며 유럽에 신종의 식물을 가져오게 됩니다.

 

중세의 유럽

 16세기가 무렵에는 인쇄술이 발명되어 향유의 제조 방법이 기록되게 됩니다. 그러면서 라틴어를 읽을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침출유와 방향수, 침출액, 다림액의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육의 중심은 수도사, 수도녀가 있는 수도원이었기 때문에 제조된 방향수는 주로 약제로써 사용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자루에 라벤더와 외의 약초를 넣어 사용하였습니다. 약초는 1665 페스트의 대발생과 같은 전염병이 유행할 때에 사용되어 향을 피웠습니다.

 17세기, 페스트 치료를 하는 의사는 보호의를 착용하였습니다. 가죽 망토, 가죽 장갑, 새의 부리같은 돌기가 붙은 가죽 마스크를 하였습니다. 호흡을 하는 새의 부리같은 부위에는 크로브와 시나몬, 외의 향신료와 약초를 넣어 사용했습니다. 가지고 다니던 막대기는 환자에게 직접 손을 대지 않아도 치료가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맥을 볼때도 막대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최근에 들어와 크로브는 티푸스를 죽이는 작용이 있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17세기까지는 영국 귀족의 저택에서는 대부분 증류 방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공기 감염에 의한 병을 예방하는 목적으로 향료의 증류와 온침을 행하거나 생약을 만들거나 하였습니다. (천연의 오일에는 살균작용이 있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유럽인은 체취가 강했습니다. 당시는 신체를 씻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의학적으로도 병에 걸리지않는 최량의 방법은 체취를 강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동물의 냄새로 체취를 강하게 하여 페스트로 부터 몸을 지킬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중세를 통해 약용 식물은 여러 형태로 의사와 약국, 평신도들이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17세기에는 실험과학이란 새로운 과학이 발달하고 약제에 포함된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화학자는 계속하여 식물중의 유효성분의 연구를 행하여 키니네, 카훼인, 모르피네, 안드로핀, 지기다리스등의 물질을 특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물질이 신체에 끼치는 작용은 강력했습니다. 반면, 정유의 사용도 계속되어 20세기에 들어서도 많은 정유가 유럽의 약국에 남아 있었습니다. 

 쟈스민의 꽃은 밤에 피기 때문에 꽃따기는 새벽에 끝내며 꽃은 신선함을 잃기 전에 자리에서 처리해야만 합니다. 8,000개의 쟈스민 꽃에서는 겨우 1g 오일밖에는 얻을 없습니다. 로즈(장미) 아주 따는 사람이 하루에 50kg 따는데 이것으로 부터 얻을 있는 오일은 방울 뿐입니다. 장미는 옛날부터 있는 꽃으로 들장미의 화석은 4000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최초로 로즈워터를 증류한 것은 페루시아인으로 중세에 이르기까지 년간 수십만자루를 수출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향수를 만들 필요성으로 부터 휘발성 용제인 알코올(석유 에텔) 이용하는 해결법(용제추출법) 생겨났습니다. 이것으로 꽃잎으로부터 정유를 추출하는 것이 쉬워졌습니다. 또한 독일은 근대적인 기술개발에 의해 합성향료의 제조가 가능하게 되어 제조가 간단한 보다 대중적인 향수가 만들어 지게 되었습니다.

 

19세기

 19세기는 위생과 탈취의 시대였습니다. 19세기에는 많은 에센스가 전에 없을 정도로 과학적으로 연구되었습니다. 1882년에 출판된 윌리엄 호이트의 약물지 Materia Medica”에는 22종류의 약국 처방 에센스와 3종류의 약국 처방외의 에센스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약국 처방의 예로는 카모마일, 쥬니퍼, 로즈마리, 라벤더를 들수 있습니다.

 19세기의 연구는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연구에 종사한 것은 과학자이며 약제사였던 카데와 무니엘드의 프랑스인들이었습니다. 또한 이탈리아의 갓티박사와 카조라박사도 연구에 임했습니다. 19세기는 향수가 계속 일반적인 것이되어 향수는 천연의 에센스로부터 제조되었습니다. 남프랑스의 그라스지방이 재배와 에센스 추출의 세계적인 중심지가 됩니다. 산업이 성숙해지며 그라스의 몇몇 회사는 생산한 정유의 새로운 농도를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20세기

 모리스 갓도훠세 화학자이며 정유를 약으로써의 성질에 흥미를 가졌습니다. 그는 방부, 살균, 항바이러스, 항염증이라는 작용들의 적용방법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어느 , 실험실에서 작은 폭발사고가 일어나 자신의 손에 화상을 입었을 , 자리에 있던 라벤더 정유에 손을 넣음으로 놀라운 효과를 얻게 됩니다. 감염증도 일어나지 않았을 아니라 상처의 흔적도 남지 않았습니다.

  , 그는 제일차세계대전중, 육군병원의 환자를 상대로 대규모의 연구를 행했습니다. 타임, 크로브, 카모마일, 레몬의 정유를 사용하여 몇몇의 대단히 훌륭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연구를 토대로 논문을 써서 중에서 자신이 행했던 피부과적 치료에 아로마테라피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1928년에 처음으로 책을 출판, 서명을 아로마테라피 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아로마테라피란 말은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갓도훠세는 정유 연구를 더욱 확대하고 분야에의 사람들의 관심을 높이는 일이 되었습니다.

 2차세계대전중, 의사들은 회저(인체의 일부분의 조직이 생활력을 잃어 죽은 상태로 되는 증세) 예방과 화상의 치료, 상처를 치료하는데 정유를 사용하였습니다. 중의 한명인, 갓도훠세로 부터 정유의 사용방법의 연구를 이어받은 종군 외과의사인 바르네 있습니다. 그는 정신병원의 환자들의 치료에 정유를 사용하여 훌륭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몇권의 책을 펴낸 , 1964년에 출판된 아로마테라피 아로마테라피의 고전적 교과서가 됩니다.

바르네 박사의 연구를 미용술에 응용한 것은 생화학자 마르그리트 모리 여사입니다. 그녀는 아로마테라피를 미용으로 발전시켜 의학과 건강과 에스테를 관련시킵니다. 그녀는 또한 크라이언트를 젊게하기 위하여 크라이언트 개인의 기질과 건강 상태에 따라, 사람을 위한 방향 조합을 합니다. 따라서 정유를 정확하게 선택하게 되면 미용의 목적 뿐아니라 많은 약효효과가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마르그리트 모리 여사  1895 – 1968  :   아로마테라피 확립을 위하여 생애를 바쳐 파리, 영국, 스위스에 크리닉을 설립 , 정유와 미용술의 연구에 의해 국제적인 상을 2 1962, 1967년에 수여받았습니다. 여사는 특히 정유의 젊음 회복의 효과에 대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성과를 1964 The Secret of Life and Youth 남기고 있습니다.)

 R.M.갓도훠세박사가 그라스에서 정유를 연구하고 있던 즈음, 알렉산더 프레밍경이 페니실링을 발견합니다. 항생물질이 널리 입수되면서 인공적으로 합성된 약품이 개발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 세계대전 이후부터입니다. 의학계에서는 이것들의 훌륭한 신약이 , 당시에 알려져 있던 병을 치료하게 되어 널리 사용될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이것은 티트리등의 정유의 수요가 공급량을 초과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럽대륙에서는 아로마테라피는, 의사에 의해 생약과 함께 넓게 처방되게 됩니다.

 최근에는 합성된 화학 약품으로 치료하기 보다는 보다 자연적인 방법, 요법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게됨으로 아로마테라피, 리후렉소로지, 호메오파시, 동양전통의료등이 각광을 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