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이론

바가바드 기타 - 거룩한 지혜의 가르침

영암스님 2008. 10. 23. 21:07
 


 

                            인도 힌두교의 살아있는 성전 <바가바드 기타>

 

 

인도에서 가장 널리 애송되는 경전은 <바가바드기타>(Bhagavadgita)이다.

권위로 따진다면 베다나 우파니샤드같은 계시서(啓示書)가 이보다 우위에 있다 하겠지만, 인도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면에서는 오히려 계시서를 능가하는 경전이 바로 이 '거룩한 자의 노래' <바가바드기타>이다.


 

 
 
'바가바드기타'의 主神 크리슈나(오른쪽)와 아르주나.
 
 

전통적으로 베다는 하층 천민들이 접할 수 없는 경전이었으며, 우파니샤드 또한 전문 지식인도 이해하기 어려운 비전(秘傳)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베다와 우파니샤드는 자신의 삶과 동떨어진 저 편의 세계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바가바드기타>는 언제나 서민 대중의 삶 속에서 호흡해 온, 대중들의 경전이다.

 

특히 <바가바드기타>는 하층 천민들에 대한 해탈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도 종교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말하자면, 베다와 우파니샤드에서 버림받은 서민 대중까지도 <바가바드기타>는 감싸안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가바드기타>는 힌두교의 살아있는 바이블이다.

 

대개의 인도 고전들이 그렇듯이 <바가바드기타>의 작자나 연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자신하기 어렵다. 전통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 경 비야사라는 사람의 저작이다. <바가바드기타>는 본래 인도의 유명한 대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ata) 제6권의 일부였다. 그러나 그 내용상 하나의 독자적인 문헌으로 읽혀져 왔으며, 오늘날에는 오히려 <마하바라타>보다 더 유명한 세계적인 종교 문헌으로 알려진다.


 

 
 
<바가바드기타>의 무대는 쿠루크쉐트라 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하스티나푸라에 자리잡은 쿠루족의 두 형제 가문, 즉 카우라바 형제들과 판다바 형제들이 쿠루크쉐트라 들판 양편에 군대를 대치시키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살육전을 벌이려는 극적인 상황에서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이 시작된다. 원래 바라타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였던 유디슈티라가 카우라바 형제들 가운데 맏형 두리요다나와 도박을 하여, 그 결과로 그는 왕국을 잃고 네 형제들과 함께 13년 동안 숲 속에 유배되었다.
 
약속한 기한이 되어 유디슈티라가 두리요다나에게 자신의 왕국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거절되고 결국 두 가문 사이에 전쟁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바가바드기타>는 바로 이 전쟁이 벌어지려고 하는 찰나에 판다바 가문의 다섯 형제 중 셋째인 아르주나와 크리슈나 사이에 오간 대화를 적은 것이다.
 
<바가바드기타>의 쿠루크쉐트라 전쟁은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모순을 나타내는, 인간 내면의 전쟁이다.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이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 놓인 아르주나의 고뇌로 시작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쟁은 죽거나 죽여야 하는, 생명이 무참히 살해되는 인간의 극한 상황이다.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은 먼저 이러한 극한상황에서 고뇌하는 아르주나의 내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아르주나는 내면의 싸움에서 미혹에 눈 멀고 두려움에 떠는 모든 사람을 대변한다. 이어서 설해지는 가르침이 더욱 매혹적인 것은, 그것이 아르주나의 내면의 큰 위기를 나타내는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 설정되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상황속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철저한 고뇌가 있기 때문에 참다운 철학이 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위기상황에서 정확히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삶 가운데 문득 찾아오는 중대한 위기상황은 우리의 마음속 궁극적인 가치에 대한 생각을 자극한다. 오직 그 때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감각의 장애를 깨부수고 내적인 실재에 닿는 데 필수적인 긴장을 얻게 된다. 아르주나의 낙심은 단지 실망한 사람의 일시적인 기분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비실재성을 일깨우는 공허감, 가슴속에 느껴지는 일종의 죽음 상태다. 아르주나는 만일 필요하다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옳은지 모른다. 그는 무시무시한 시험에 직면하였으며, 감당하기 어려운 고뇌가 그를 뒤흔든다. 아르주나가 마주치는 절망감은 깨달음의 노정에서 꼭 통과해야 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다. 이처럼 <바가바드기타>는 전쟁 그 자체보다는 이를 통하여 내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갈등을 다루고 있다.
 
 
 
 
영혼의 삶은 쿠루크셰트라의 전쟁터로 상징되며, 카우라바족은 영혼의 진전을 방해하는 적이다. 아르주나는 시험을 물리치고 감정을 제어하여 인간의 왕국을 되찾으려고 시도한다. 영적 진전은 고통과 자기 극기를 통해서 가능하다. 내면의 삶에 대한 추구는 '사지가 주저앉고, 입은 바싹 타며, 전율이 온 몸을 휩싸고,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아르주나의 고뇌를 요한다. 이어지는 크리슈나의 가르침이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아르주나의 철저한 고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가바드기타>의 시작은 갈등과 모순, 이기심, 악마의 부드러운 속삭임이 교차하는 인간의 내면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크리슈나와 아르주나의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우리가 듣는 것은 전쟁의 아비규환이 아니라, 단지 신과 인간 사이의 진지한 교감을 보게 된다. 전차는 고요한 명상의 자리가 되고, 가식의 목소리가 잠잠해진 전쟁터는 오히려 참된 진리에 대한 사색을 위한 적합한 장소가 되는 것을 느낀다.
 
근현대에 들어 인도에서 <바가바드기타>는 더 큰 의미로 부각된다. 영국 식민지에 대한 스와라지(自立)운동을 주도했던 틸락은 <바가바드기타>를 인도독립 운동에 행동의 철학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받아 들였으며, 마하트마 간디에게 <바가바드기타>는 '영적인 지침서'였다. 간디는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마치 모르는 영어 단어를 영어사전에서 찾아 보듯이 이 행동의 사전을 찾아보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슈리 오로빈도 고슈, 라다크리슈난, 스와미 비베카난다, 시성 타고르 등 수 많은 인도의 정신적인 지도자들에게 <바가바드기타>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1785년 찰스 윌킨스(Charles Wilkins)의 영어 번역이 나온 이래 <바가바드기타>는 서양의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자국의 언어로 소개되었다. 이것은 <바가바드기타>가 인도의 경계를 넘어서서 인류의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말로 번역된 최초의 힌두교 경전 또한 <바가바드기타>였다 
 
 
 
 

 

 
 
 
 
바가바드 기타  -  거룩한 지혜의 가르침
 
 
1절. 바가반 크리슈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 불멸의 가르침을 태초에 비바수반에게 가르쳐 주었고, 비바수반은 그것을 마누에게 가르쳐 주   었다. 그리고 마누는 이크수바쿠에게 가르쳐 주었느니라.
 
  2절. 이런 식으로 거룩한 족속들은 차례 차례로 서로 이어주며, 이것을 배웠느니라.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이 불멸의 가르침은 마침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느니라. 오 아르쥬나.
 
  3절. 바로 이 불멸의 가르침을 내가 오늘 너에게 전해 주노니, 너는 나의 신자 또는 나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장 높은 신비이니라.
 
  4절. 그러자 아르쥬나가 묻기를: 비바수반은 당신보다 훨씬 오래 전에 태어나셨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그 가르침을 태초에 그에게 전해주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제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5절. 바가반 크리슈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르쥬나여, 나는 너와 수많은 생사를 거쳐서 왔느니라.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모른다. 오, 적을 쓸어버리는 자야.
 
  6절. 나는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으면서 모든 존재의 주인이니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듯이 보이는 것은 다만 네 눈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나는 그저 자연의 힘을 통해서 내 바탈을 드러낼 뿐이다.
 
  7절. 오, 바라타족의 아들, 아르쥬나여! 어느 때에 있어서든지 정의(다르마)가 약해지고 불의가 판을 치는 때이면, 나는 곧 나 자신을 나타내느니라.
 
  8절. 선한 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악한 자를 멸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정의를 다시 세우기 위하여 나는 시대에서 시대로 태어난다.
 
  9절. 오, 아르쥬나, 이와 같이 내 거룩한 나타남과 내 사명의 본질을 정말 잘 알고 있는 자는 죽어도 다시 태어남이 없이 그는 나에게로 오느니라.
 
  10절. 집착과 두려움과 노여움에서 해방되어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나를 믿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은 지혜 깊은 참회로써 죄를 씻어, 내가 지니고 있는 초월적인 바탈에 이르렀느니라.
 
  11절. 나는 어떤 사람의 희망도 꺽어 버리지 않고 그것을 제 성격에 따라 자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 아르쥬나, 사람들은 여러 가지 길을 따라 제각기 진리를 찾고 있지만, 나는 그들이 도달할 궁극이요, 진리 그 자체이니라.
 
12절. 사람들은 속세에서 하는 사업의 성공을 위하여 여러 신들 앞에 공양을 바친다. 그러면 속히 그 결과가 오기 때문이다.
 
  13절. 이 사회의 네 가지 계급인 브라흐만, 크샤트리야, 바이샤와 수드라는 세 가지 성품과 업에 따라 내가 창조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비로 그 창조자일지라도 나는 아무일도 한 바가 없이 그저 영원 불멸의 있음이니라.
 
  14절. 어떠한 행위일지라도 나를 더럽히지는 못한다. 나에게는 행위의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도 없다. 이와 같이 내 본질을 깨달은 자는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 행위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다.
 
  15절. 이러한 깨달음을 지니고 해탈을 찾는 옛 수행자들은 행동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도 옛 수행자들이 행동한 것처럼 행동하라.
 
  16절. 무엇이 행동이요, 무엇이 행동 아니함인가? 이 의문에서는 슬기로운 자들도 미혹하였느니라. 내가 이제 행동이 무엇인가를 너에게 일러주리라. 그것을 앎으로써 너는 모든 악에서 벗어나게 되리라.
 
  17절. '행동'이 무엇인가는 반드시 알아야 하며, '행동 아니함'이 무엇인지도 반드시 알아야 하며, '행함이 없음'이 무엇인가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업의 길은 참으로 헤아릴 수 없다.
 
  18절. '행동함' 속에서 '행동 아니함'을 보고 '행함이 없음' 속에서 '행함'을 보는 자는 진실로 깨달은 사람이니라. 그러한 사람이 요가를 닦는 이요, 모든 행위를 완전하게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절. 모든 일은 욕망과 야망을 떠나 행하고, 그 행위는 나를 아는 지혜의 불 속에서 깨끗이 타버린 사람, 그 사람을 슬기로운 자들은 정말 어진 이라고 불렀느니라.
 
  20절. 행위의 결과에 대한 모든 집착을 포기하고, 이 세상의 그 어떠한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또 기대하지도 않고, 또 항상 스스로 만족함에 있다면, 그러한 사람은 그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실은 아무 것도 한 바가 없는 것이다.
 
  21절. 몸과 마음을 다듬어, 아무 것도 바라는 바 없이 모든 소유물을 내버리고, 참으로 진실되게 행동하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
 
  22절. 얻고자 함이 없이 우연히 오는 것으로 만족하고, 대립되는 이원성의 차원을 넘어서서, 부러워하는 마음 없이, 성공과 실패를 하나로 보는 사람, 그 사람은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행동에 얽매임이 없느니라.
 
  23절. 이렇게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해탈하여, 자기 마음은 지혜 안에서 확고부동하며, 또 모든 행동을 거룩한 공양되게 하는 사람은 참으로 순수한 사람이다.
 
  24절. 공양을 바치는 행위도 브라흐만(절대적 진리)이요, 바쳐지는 그 물건 자체도 브라흐만이니, 오직 브라흐만에 의하여 브라흐만의 불 속으로 바치어진다. 그는 그의 모든 행위 속에서 브라흐만을 본다. 왜냐하면 그는 실재 속에서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25절. 어떤 요가하는 사람들은 다만 신들을 예배하기 위하여 공양을 바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자아(自我) 그것을 공양으로 브라흐만의 불 속에 바친다.
 
  26절. 또 어떤 사람은 다섯 감관들을 제어함으로써 그것을 바치고, 또 어떤 이는 다섯 감관의 대상을, 감각을 태워버리는 불 속으로 던진다.
 
  27절. 또 어떤 사람은 모든 감각 작용과 생기의 활동을 요가의 불길 속으로 바치나니, 이것은 깨달음으로 불붙어진 불길이다.
 
  28절. 또 어떤 사람은 재산을 공양으로 바치고, 또 어떤 사람은 고행을 바치고, 또 어떤 사람은 요가수행을 바치고, 또 맹세를 굳게 지키는 구도자들은 경전 읽기와 지식을 공양으로 바치기도 한다.
 
  29절. 또 어떤 사람은 호흡을 공양으로 바쳐서, 날숨을 들숨에 바치기도 하고, 들숨을 날숨에 바치기도
   하며, 날숨 들숨을 다 공양으로 바치기도 한다.
 
  30절. 또 어떤 사람은 음식을 억제하기도 하고, 숨을 숨에 바치기도 하나니, 이들은 다 희생을 아는
이들이요, 그럼으로써 이들의 업장은 모두 소멸되어 버리느니라.
 
31절. 공양을 바치고 남은 음식은 감로이니, 그것을 받아먹는 자는 영원한 브라흐만에 이르느니라. 아르쥬 나, 이 세상에서도 공양을 바치지 않는 자는 복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물며 그 다음 세계에서 복될 수 있겠는가?
 
  32절. 이와 같이 가지가지의 공양 바침이 베다의 경전 속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 모든 것이 다 행동으로 나타났느니라. 이것을 아는 자는 곧 해탈하리라.
 
  33절. 재물을 공양으로 바치는 것보다 법(法) 공양이 더 낫느니라. 오, 언제나 적을 쓸어버리는 자야, 모든 행동은 법(다르마)의 지식에 의해서만 그 절정에 이른다.
 
  34절. 지극한 믿음으로, 진실된 질문으로, 헌신적인 섬김으로, 구루(지혜의 사람)에게 나아가 참된 진리를 배워라. 그러면 그 진리를 본 참된 지혜의 사람, 스승은 그대에게 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35절. 아르쥬나, 이것을 앎으로써 다시는 미혹함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이로 인하여 너는 존재하는 모든 뭇 것들을 모두 이 자아(自我) 안에서 볼 것이요, 또 나에게서 볼 것이니라.
 
  36절. 설혹 네가 모든 죄인 가운데서 가장 죄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너는 다만 이 반야선을 타고서 그 모든 죄악을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37절. 마치 타는 불길이 그 땔감을 재로 만들어버리듯이 오, 아르쥬나, 반야(지혜)는 모든 행위를 재로 만들어버린다.
 
  38절. 진실로 이 세상에서 반야처럼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힘은 없나니, 요가에 의해서 완전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스스로 자아 안에서 환하리라.
 
  39절. 믿음이 있고, 수행을 하며, 진심으로 구하는 자는 반야를 얻을 것이니, 반야가 생기면 머지않아 궁극의 평화에 도달할 것이다.
 
  40절. 그러나 반야도 없고, 믿음도 없고, 여우같이 의심하는 성질만이 있는 사람은 망할 사람이니, 의심하는 자에게는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떤 안심(安心)도 있을 수 없느니라.
 
  41절. 오오, 아르쥬나여! 요가로써 모든 행위를 내버리고, 반야로써 의혹을 헤쳐버리며, 그리고 언제나 아트만과 하나되어 있는 자는, 어떤 행위라도 그를 얽매이게 하지 못한다.
 
  42절. 그러므로 그대는 이 반야검으로 무지와 의혹의 가지를 잘라버려라! 그라하여 행동하는 행동하는 요가가되게 하라! 오, 바라타의 아들아! 일어나라! 싸우라!
 
  56절.노여움으로부터 이미 초월해버린 사람, 바로 이러한 사람을 일컬어 확고한 통찰을 지닌 성자라고 하느니라.
 

 

57절. 어떤 것에도 지나친 애착을 품지 않는 사람, 좋은 것을 얻거나 나쁜 것을 얻거나 우쭐거리지도

움츠리지도 않는 사람, 이러한 사람의 지혜는 이미 확고부동이니라.  

 
   58절. 마치 거북이가 자기의 사지를 끌어들이듯이 자기의 모든 감각을 그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끌어들인 사람, 바로 이러한 사람을 일컬어 지혜가 확고한 성자라고 하느니라.
 
  59절. 감각의 대상들은, 그것들을 먹고 살지 않는 사람 앞에서는 모두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들에 대한 입맛은 끈질기게 남는다. 그런 가장 높은 것을 볼 때 이 입맛마저 사라지느니라.
 
     60절. 오, 쿤티의 아들이여, 사나운 감각들은 그것들을 다스리려고 애쓰는 현명한 사람의 마음마저도
억세게 휘몰아 간다.
 
    61절. 모든 감각을 제어하면서, 나만을 바라보며, 마음을 통일하고 앉아 있을지어다. 감각을 자제의 힘으로
제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지혜가 확고히 서 있느니라.
 
  62절. 사람이 감각의 대상들을 골똘히 생각하면, 그것들에 대한 집착이 생겨난다. 집착에서 욕망이 생기고, 욕망은 분노를 낳는다.
 
  63절. 분노로부터 미혹이 생겨나고, 미혹함에서 기억의 혼란이 오며, 기억의 혼란에서 知性(Buddhi)의 파괴가 오고, 지성이 파괴되면, 그는 멸망하느니라.
 
  64절. 그러나 자기 수련을 쌓은 사람은 아트만으로 애욕과 혐오감을 벗어나 있으므로, 이러한 사람은 모든 감각의 대상속에서 지내면서도 언제나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느니라.
 
  65절. 이 마음의 평화속에서 그의 모든 슬픔은 끝이 난다. 참으로 드높아진 意識의 사람은 곧 확고한 지혜에 굳게 서게 되느니라.
 
  66절. 자기 마음 하나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은 확고한 지혜(Buddhi)가 없어서 아트만의 실재를 추측할 수도 없다. 지혜가 없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나니, 평화가 없는 사람에게 어찌 행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67절. 사람의 마음이 떠도는 감각에 지배될 때, 그의 지성은 그것에 휩쓸려 가기를 마치 물위의 배가 바람에 휩쓸리듯 하느니라.
 
  68절. 그러므로 감각을 그 대상들로부터 모두 물러서게 한 사람은, 오, 억센 팔을 가진 자여, 그 사람은 지혜가 확고하게 서있는 사람이니라.
 
  69절.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밤에 감각의 제어자는 깨어 있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깨어 있을때, 진리를 보는 賢者에게는 밤이다.
 
  70절. 강물은 끊임없이 바다로 흘러 들지만, 바다는 결코 줄지도 늘지도 않으며 항상 한결같은 상태에 있는 것과 같이 욕망도 성자의 마음에 흘러들지만 항상 평화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애욕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은 결코 평화를 누릴 수가 없다.
 
  71절. 사람이 모든 욕망을 버리고,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갈구함이 없이 행동할 때, 그는 평화에 도달한다.
 
  72절. 이것이 브라흐만(Brahman)의 경지이니라, 오, 파르타(Partha)여, 이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결코 미혹되지 않는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죽음의 순간에서도 그는 브라흐만의 열반(Nirvana)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명예를 얻을 때에나 또 모욕을 당할 때에도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은, 전쟁터에서도 적군과 아군을 따로 보지 않는다. 이와 같은 사람은 항상 어떤 상태분별적인 판단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람을 일러 구나를 초월한 사람(Gunatita)이라고 하는 것이다.
 
타고난 본성에 의하여 정해진 의무는 비록 잘못함이 있더라도 버리지 말 것이니 모든 경영(經營)은 다 결함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불이 연기에 싸여 있듯이... 그 이성은 언제 어떤 것에도 집착이 없고, 그 자아는 정복되어 있어 욕망을 떠난 사람은 내버림에 의하여 최고의 지경 즉 초행작에 이르느니라.
 
언짢은 일이라 해서 싫어하지도 않고 좋은 일이라 해서 집착하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선성으로 가득 차 있는 내버림의 사람이니, 그는 어질고 모든 의심이 사라진 사람이니라.사실로 몸을 가지고 있는 이로서 행작을 온전히 버리기는 불가능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그 행작의 결과를버린 사람을 내버림의 사람이라고 하느니라.
 
보시란 마땅히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은혜 갚음이 돌아올 수 없는사람에게 할 것인데, 적당한 곳과 때에서 그러한 사람에게 하면 그 보시는 선성적이라고 하느니라.그러나 은혜 갚음을 기대한다거나, 다른 무슨 소득을 바라면서, 혹은 본의아니게 하는 보시는 동성적이라고 하느니라.적당하지 못한 때와 곳에서 적당치 못한 사람에게 예의도 없이 업신여기는 태도로 하는 보시는 암성적이라고 하느니라.
 
바라타의 아들아, 각 사람의 신앙은 그 성질에 따라 이루어 진다. 사람은 신앙으로 된다. 무엇을 신앙하든 간 그 신앙하는 대로가 그 사람이니라.
 
선성의 사람은 천신을 예배하고, 동성의 사람은 야차나 나찰을 예배하고 그 밖의 암성의 사람은 죽은 망령, 또는 유령의 무리를 예배한다.
 
이 영혼의 멸망으로 이르는 지옥의 문은 세 겹으로 되어 있으니, 애욕과 분노와 탐욕이다. 그러므로 이 셋을 버려야 하느니라.쿤티의 아들아, 이 어둠의 세 겹 문을 벗어난 사람은 자아에 대해 좋은 일을 한 다음,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느니라.
 
두려움 없음, 마음 깨끗함, 지식 요가에 굳게 섬, 자비, 자제, 희생, 경전외기, 고행, 곧음, 비폭력, 참, 노염 없음, 내버림, 안정, 몹쓸 소리 아니함, 산것을 불쌍히 여김, 탐내지 않음, 온화함, 수줍음, 신중함, 정신 왕성, 참아줌, 억셈, 깨끗함, 샘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음, 이런 것들은, 바라타의 왕자야, 거룩한 바탈로 난 사람들의 받아가지고 있는 것이니라.몸의 주인이 어떤 몸을 가질 때나 또 그것을 떠날 때는 그것들을 가지고 간다. 마치 바람이 향기를 그 있던 곳에서 걷어 가지고 가듯이.그는 귀와 눈과 촉감과 미감과 냄새 맡음과 의식에 붙어 있으면서 감각의대상을 즐긴다.
 
욕망, 미움, 즐거움, 괴로움, 모음 의식, 단단함, 이것을 간단히 말한다면 밭 및 그 변화니라. 안 교만함, 거짓 없음. 안 사나움, 참음, 곧음, 스승 섬김, 깨끗 굳셈, 자제, 감각의 대상에 대해 애착이 없음, 나란 생각이 없음, 삶 죽음 늙음 병의 괴로움과 고통에 대해 생각을 가짐, 자녀, 아내, 집 그런 것들에 대해 무애착 무관심함, 좋은 언짢은 일에 대해 평등한 마음을 가짐, 전심으로 하는 요가에 의하여 내게 대한 흔들림 없는 신앙을 간직, 한적한 곳을 떠나지 않으며, 사람이 많이 모이는 데를 좋아하지 않고, 영적 자아에 대한 영구성 있는 지식을 가지며, 진리의 지식의 구경에 대한 뚫어봄이 있는 것, 이것을 참 지식이라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지식이 아니니라.
 
언제 기뻐하는 일도 없고, 언제 원망하는일도 없으며, 언제 슬퍼도 아니하고, 언제 바라지도 아니하며, 선, 불선을 떠나서 믿는 사람, 그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니라.대적과 벗에게 평등히 하며, 명예, 불명예를 같이 보고, 추위, 더위, 괴롬, 즐거움에도 한결같으며, 애착을 버리고, 비난과 칭찬을 같이 보며, 잠잠하여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을 곳이 없으면서도 마음이 턱 가라앉아 믿는 사람, 그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니라.진실로 지식은 끊임없는 닦음보다 나으며, 명상은 지식보다 낫고, 행동의 열매를 내버림은 명상보다 나으니, 그 내버림으로 인하여 즉시로 평화가 오느니라.
 
그와 같이 언제나 마음을 다해 당신을 예배하는 사람과 불멸이시요 나타나 보이지 않는 이를 예배하는 사람과 누가 더 요가를 잘 아는 사람입니까?마음을 내게다 쏟고, 언제나 마음을 오로지하여 지극한 믿음으로 나를 예배
하는 사람, 그 사람을 나는 최상의 요기라고 생각한다.그러나 '불멸이신 이' 형언할 수 없으신 이' 나타나 보이지 않으시는 이'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이' '불가사의이신 이' '불변이신 이' '부동이신 이'그리고 '안고하신 이'를 예배하며 모든 감각을 다스리고, 어떤 경위에 처해서도 평등한 마음을가지며 모든 생류의 안녕을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또한 분명히 내게로 올 것이니라.
 
, 자나르다나시여, 당신의 이 인자하신 모습을 뵈오니 제 마음이 가라앉고 제 본성으로 돌아왔습니다.나의 이 지극히 보기 어려운 모습을 너는 이제 보았느니라. 모든 신들조차도 이 모습을 보기를 항상 원하느니라.베다에 의해서도, 고행에 의해서도, 자선에 의해서도, 희생에 의해서도 네가 지금 본 나의 그 모습은 볼 수 없느니라.
 
아르주나야, 그러나 외곬으로 믿는 마음에 의해서만 나는 나대로 알 수 있고, 참대로 볼 수 있고, 또 들어갈 수 있느니라. , 파란타파야!판두족의 아들아, 나를 위해 일을 하고, 나를 자기 목적으로 알고, 나를 진심으로 믿고, 아무것에도 집착이 없으며, 모든 물건에 대하여 악의를 품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내게로 오느니라.
 
그러므로 당신께 절하고 엎디어 빕니다. 찬양하올 주시여,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오, 하나님이시여,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하듯 친구가 그 친구에게 하듯, 사랑하는 자가 그 사랑에게 하듯, 저를 참아주시옵소서당신은 불멸이시요, 깨달아 이르는 지극히 높으심입니다. 당신은 우주의 궁극의 근본이시요, 당신은 무너짐 없는 영원한 진리를 지켜주시는 이이십니다.
 
당신은 으뜸 사람이시라 저는 믿습니다처음도 중간도 나중도 없으시고 힘이 한이 없으시며, 한없는 팔을 가지시고, 해 달로 눈을 삼으시는 당신이 입에서 나오는 불꽃으로 이 우주를 불사르고 계신 것을 제가 봅니다.이 궁창과 땅 사이의 공간과 또 모든 방향이 오직 당신 하나만으로 꽉차 있습니다.
 
, 마하트마시여, 당신의 이 놀랍고 무서운 모습을 보고 삼계가 부르르 떱니다.아르주나야, 나는 창조에 있어서, 그 맨 첨이요 나중이며 또 그 중간이요. 밝힘 중에서 자아에 대한 밝힘이요, 변론자들에 있어서 올바른 대화이며 나는 글자 중의 '아'자요, 합성에 있어서 드반드바요, 불멸에의 시간이요 그리고 나는 두루 사방에 얼굴을 향하고 있는 창조주니라
 
나는 모든 것의 근원이다. 모든 것이 내게서 나오느니라. 지혜 있는 자는 그것을 알아 마음을 온전히 해 정성으로 나를 예배한다.
 
무슨 일을 하거나, 무엇을 먹거나, 무엇을 바치거나, 무엇을 보시하거나 또 어떤 고행을 하거나, , 쿤티의 아들아, 너는 그것을 내게 희생하는 것으로 알고 하여라.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좋다 언짢다의 행동의 열매에 얽어매임에서 벗어 날 것이고, 네 마음을 굳건히 세워 내버림의 길을 닦음으로써 너는 내게 이를 수 있느니라.나는 모든 것에 대하여 평등하다. 내게는 미운 것도 없고 고운 것도 없다. 그러나 나를 정성으로 믿는 사람은 그는 내 안에 있고 나는 그 안에 있다.
 
알지어다, 나는 이 세계의 아버지요, 어머니요, 지지하는자요, 조상이다. 또한 나는 알아야 하는 대상이요, 정결케 하는 자요, '아옴'이다. 또 나는 [리그 베다]요, [사마 베다]요, [야주르 베다]다.나는 궁극이요, 붙드는 자요, 주요, 증거요, 거처요, 피난처요, 친한 벗이다. 나는 본원이며, 종멸(終滅)이며, 기초며, 안식처며, 씨며, 불멸이다.나는 열을 준다. 또 비를 거두고 주는 것도 나다. 나는 죽지 않음이요 또 죽음이다. 아르주나야, 나는 있음이요 또 안 있음이니라.
 
모든 것은 나의 나타나 보이지 않는 몸에 의하여 두루 뚫려 있다. 모든 있음이 다 내 안에 있지만 나는 그것들 안에 있지 않느니라.그러나 또 그 있음은 내 안에 있지 않다. 나의 알 수 없는 신비의 능력(요가)을 보라. 나의 아트만(自性)은 만유의 원동력이로다. 만유를 지지하는 것은 바로 나지만 내가 그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니라.마치 안 가는 곳이 없는 저 큰 바람이 언제나 공간에 의지하고 있듯, 그렇듯이 모든 있음이 내 안에 있느니라. 너는 그것을 알라
 
모든 ((감각의)) 문을 닫고, 마음을 심장 속에 몰아넣고, 숨을 정수리에 모으고, 요가의 자세로 자리를 잡고 앉아, 아옴의 외마디 브라만을 부르며 나를 기억하고 몸을 떠나가는 자는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느니라.
 
(地), 물(水), 불(火), 바람(風), 에테르(空), 마음(識), 이성, 나(我執, 自我意識), 이것이 내 바탈의 여덟 갈래다. 그렇지만 마하바후야, 그것은 나의 낮은 바탈일 뿐이니라. 넌 나의 다른 더 높은 바탈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얼이라고 하니 이 세계가 그것으로 버티어 있느니라.
 
사람이 만일 나를 모든 곳에서 보고 모든 것을 내 안에서 본다면 내가 그에게서 잃어짐도 없고 그가 내게서 잃어짐도 없을 것이니라.
 
몸과 머리와 목을 꼿꼿이 일직선으로 가져 움직이지 말고 눈으로 코끝만을 들여다 보며사방으로 눈을 팔지 마라.
 
모든 외계와의 접촉을 끊고, 시력을 미간에 모으고 앉아, 날숨과 들숨을 고르게 하여 콧구멍으로만 통하게 하며, 감각과 의식과 이성을 제어하여 해탈을 목적하고 욕망과 공포와 분노를 내버리는 성자는 이미 해탈을 얻었느니라.
 
겸손한 공경으로, 거듭하는 질문으로, 받들어 섬김으로써 스승에게서 그것을 배울지어다. 참을 본 지혜자(聖人)는 네게 지식을 주리라. 판두의 아들아, 이것을 앎으로써 너는 다시 미혹에 떨어짐이 없으리라. 또한 이로 인하여 너는 만유를 남김 없이 자아 안에 볼 것이요, 또 내게서 볼 것이니라.
 
설혹 네가 모든 악인 중에서 극악의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너는 다만 이 지식의 배에 의하여 모든 죄악을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니라.마치 타는 불길이 그 연료를 재로 만들어버리듯이, , 아르주나야, 지식은 모든 행위를 재로 만드느니라.이 세상에 지식처럼 정결케 하는 힘이 있는 것은 없느니라. 요가에 의하여 완전한 지경에 이른 이는 때가 이르면 스스로 자아 안에서 이것을 발견하리라.믿음이 있고, 감각을 제어하여 전심으로 구하는 자는 지식을 얻을 것이니, 지식이 있으면 머지않아 최고의 평화에 도달할 것이니라.
 
행위의 결과에 집착함이 없이 언제나 족한 줄을 알고, 어떤 것에도 의뢰하지 않으면 아무리 행위 속에 빠져 있어도 그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느니라.아무 바람 없이 자아와 마음을 제어하고, 모든 소유를 내버리고, 다만 몸으로만 행동하는 자는 죄를 범함이 없느니라.
 
유위(有僞)가 나를 더럽히지 못하고, 그 결과를 원하는 마음도 내게는 있지 않다. 나를 그와 같이 아는 자는 유위에 얽매임이 없느니라.그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해탈을 찾는 옛 사람들도 일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옛 사람이 옛날에 일하였듯이 너도 또한 일할지어다.무엇이 유위요? 무엇이 무위냐? 여기서는 지혜 있는 자도 미혹하였느니라. 내 이제 유위가 무엇임을 너에게 일러주리라, 그것을 앎으로써 네가 악한 것에서 건져짐을 얻으리라.
 
모든 감관에는 그 대상에 대한 좋아함과 싫어함이 붙어 있다. 누구나 그 지배 아래 들어서는 아니 된다. 그 둘은 가는 길의 방해꾼들이니라.잘하지 못하면서라도 제 의무를 하는 것이 남의 의무를 잘하는 것보다 낫다. 제 의무를 다하다 죽는 것이 좋으니라. 남의 의무는 무섭기만 할 뿐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제가 한 어떤 일에 대해서도 (利)라 생각하는 것이 없고, 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도 그러한 것이 없다. 일체의 산것 중에서 어느 것에도 그의 이(利)가 달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없다.그러므로 집착을 떠나서 언제나 마땅하게 하여야 할 것을 하라. 집착없이 행하는 자가 가장 높은 데 이르기 때문이다.자나카나.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 완전에 이른 것도 행함에 의해 된 것이다. 너도 이 세계의 유지를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무엇이거나 어진 사람이 한 것이면 다른 사람들이 따라 하는 법이다. 그가 모범을 세우면 세상은 그것을 따른다.
 
죄 없는 자야, 내가 일찍이 말했듯이 이 세계에는 두 가지 길이 있느니라. 생각하는 사람들 위한 지식의 길과 행동하는 사람을 위한 행함의 길.사람이 무위에 이르는 것은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요, 또한 단순히 그것을 내버림으로써 완전의 지경(成滿位)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어떤 사람도 비록 한 순간이라도 무위로 있을 수는 없다. 누구나 다 천성에서 나오는 충동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네 할 일은 오직 행동에만 있지, 결코 그 결과에 있지 않다. 행동의 결과를 네 동기가 되게 하지 마라. 그러나 또 행동 아니함에도 집착하지 마라.
 
모든 산것의 모양이 그 처음에는 나타나 뵈지 않고, 그 중간에는 보이고, 그 끝에 가서는 다시 뵈지 않는다. 오, 바라타의 아들아, 거기 무엇이 한탄할 것이 있느냐? 한 사람은 그것을 보고 놀라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놀랍다 말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그것을 듣고 놀라워한다. 그러나 듣고 나서도 아무도 그것을 으로 안 자는 없다.
 
영원한 생명은 죽지 않음과 다르다. 몸을 가진 자는 다 죽게 되어 있다. 그것은 생사를 초월하는 일이다.우리가 아직도 슬픔,아픔의 지배를 받고, 물질적인 사건의 시달림을 받으며, 마땅히 뚫고 나가야 하는 의무의 길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우리가 아비쟈(avidya) 곧 무지에 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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