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요가대학연수/요가의종류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중에서 ....

영암스님 2006. 5. 10. 00:16

 

 

시간과 형태와 상태에 따른 轉變을 대상으로 總制(삼야마)를 행하면 과 거와 미래를 안다.
지금부터 여러 가지 초자연력과, 어떤 훈련을 통해 그런 초자연력이 생기는지 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다. 그런데 위대한 스승들은 한결같이 초자연력을 진리의 길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로 여긴다. 파탄잘리도 예외는 아니다. 스리라마크리슈나는 초자연력을 '쓰레기 더미'라고 잘라 말했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결코 기적을 근거로 믿음을 가져서는 안되며, 기적의 배후에 있는 진리를 보아야 한다고 명확하게 가르쳤다. 그리스도 역시 표적을 구하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그런 경고가 제자들에게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불행한 일이다.
초자연력은 분명히 존재하며, 요가에 대해 객관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파탄잘리는 이 사실 역시 무시하지 않는다. 이 책을 번역하는 우리로서도 있는 그대로 번역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정한 구도자라면 초자연력 따위는 허접쓰레기 정도로 여기고 지나갈 것이 분명하기에 해설은 될 수 있는한 간략하게 붙일 생각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초능력 현상이 매우 드물다. 그래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런 능력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지속적인 집중 훈련을 통해 개발해 낼 수 있다. 서구인들은 다른 곳에 집중했다. 즉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정신 능력 대신 물질에 집중하여 거대한 물질문명을 발전시켰다. 텔레파시 대신 전화를 만들었고, 공중 부양 대신 헬리콥터를 만들었으며, 천리안 내지 천안통(天眼通) 대신 텔레비전을 만들어 냈다. 서구인들이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물질주의는 그리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락한 요기들이 자신들의 초능력을 상업적인 목적이나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사회에서 사는 것은 물질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는 것 보다 훨씬 더 불쾌한 일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구도자라면 '초자연력은 현상 세계 차원에 속한 것으로 써 깨달음의 길에 놓인 장애물이다.'라는 파탄잘리의 경고를 기억하고, 정신의 초자연력에 대한 갈망을 버리고 참된 영적 성숙의 길로 돌아서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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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일반적인 경험 속에서는 소리와 소리에 대한 관념과 반응이 구별되지 않고 뒤섞여 있다. 하지만 이 셋은 서로 다른 것이다. 이 '서로 다름'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모든 생물이 내는 소리의 뜻을 알게 된다.
어떤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고, 또 그에 대해 이런저런 반응을 하게 된다. 이 셋은 각자 따로따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는 구별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불이야!'하고 외치면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벌떡 일어나는 식이다. 하지만 요기는 그 셋을 서로 구별할 수 있으며, 그 구별에 대해 總制를 행함으로써 외국어는 물론이고 동물들이 내는 소리까지도 그 뜻을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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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과거에 지나간 생각의 흐름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지나간 삶[前生 ]을 알게 된다.
생각의 흐름이 지나가면 마음속에 그 흔적이 남는다. 그게 바로 기억이다. 기억은 되살려 낼 수 있다. 그래서 지나간 생각의 흐름에 집중하여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는 훈련을 하면 前生을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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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다른 사람의 몸에 나타난 특징들에 대해 總制를 행하면 그의 마음의 색 깔을 안다. (이렇게 알게 되는 것을 他心知라고 한다. 譯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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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他心知에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내용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 경 우에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내용은 總制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 이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總制즉 심장을 대상으로 총제를 해야 한다. (3-35를 보라. 다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他心通이라고 한다. 譯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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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몸의 형태를 대상으로 삼아 總制를 행하면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자신의 몸이 현상으로 나타나는 힘과 보는 사람의 눈이 분리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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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소리를 다른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게 할 수 있 다.
쉽게 말하자면 방안에 그대로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은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고, 듣지도 냄새 맡지도 못하도록 자신을 완전히 숨길 수 있다는 말이다. 외적인 형상은 사라져도 형상의 배후에 있는 실체(reality)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형상의 배후에 있는 실체는 육체의 감각 기관으로는 인지하지 못한 다. 그래서 실체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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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카르마는 그 열매가 빨리 나타나는 것과 천천히 나타나는 것 두 가지가 있다. 이들 두 종류의 카르마를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거나 죽음의 前兆 들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자신이 언제 육체를 떠날 것인지를 정확 히 알게 된다.
여러 가지 육체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죽음의 前兆로 나타난다.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환상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독자들이 엉뚱한 결론을 내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는 더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힌두 교인들은 죽는 순간에 품고 있던 생각이 다음 생의 성격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죽을 시간을 정확히 아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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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 사랑과 우정 같은 것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그런 힘을 얻는다.
이 구절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기뻐하고, 불행을 안쓰럽게 여기며, 덕스러운 행동을 좋아하고, 악에 물들지도 않고 증오하지도 않는 마음을 닦으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는 1-33의 내용과 상응한다. 이런 수행을 열심히 한 요기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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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코끼리의 힘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코끼리와 같은 힘을 얻는다. 다 른 그 어떤 힘을 대상으로 해도 總制하는 대상의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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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자기 속에 있는) 내면의 빛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감추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투시력과 멀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천리안이 생긴다.
여기서 말하는 '내면의 빛'은 1-36에서 언급된 심장 차크라의 빛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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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 태양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우주를 아는 힘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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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달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별들의 배치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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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 북극성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별의 운행을 알게 된다.
파탄잘리의 우주론과 현대 물리학의 이론들 사이에 대단히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한 고대 인도인들은 정확한 과학적인 기구를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고 완전한 우주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에게 우주를 통찰할 수 있는 정신적인 능력이 없었다면 현대 물리학이 도달한 결론과 거의 같은 우주관을 결코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과학적인 도구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감각 차원의 경험을 근거로 지식 체계를 구축한다. 그러나 그들의 앎의 체계는 감각 경험을 근거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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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 배꼽[丹田]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몸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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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목구멍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배고픔과 목마름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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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목과 가슴 사이에 있는) 자라관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자세가 확립된다. ('자라관'은 자라 모양의 관으로써, 해부학 적인 기관이 아니라 한의학에서 말하는 經絡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는 에 너지 통로를 가리킨다. 30절과 31절의 '배꼽'이나 '목구멍'도 해부학적인 육체 기관이 아니라 그 부위에 있는 '나디'nadi, 즉 에너지 통로를 뜻한다. 뒤에 나오는 뒤통수나 심장 역시 같은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譯註)
'견고한 자세가 확립된다'는 것은, 이를테면 뱀이나 도마뱀처럼 생명력은 충만하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견고성을 얻으면 명상하는 동안 주위 상황이나 타의에 의한 움직임으로 인해 명상이 방해받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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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뒤통수 안의 내적인 빛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고차원의 경지에 올 라간 스승들[천상적인 존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뒤통수 안의 내적인 빛'과 정수리에 있는 일곱 번 째 차크라에서 방사되는 빛을 혼동하면 안된다. 궁극의 의식 센터인 일곱 번 째 차크라에 대해서는 2-50을 보라. (이 구절을 일곱 번 째 차크라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주석가들도 있다. 譯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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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 (지금까지 언급한 總制를 특별히 행하지 않아도) 마음을 깨끗하게 닦 은 사람에게는 지혜의 빛[照明智]이 비치고, 그 빛을 통해서도 모든 초 자연력이 저절로 나타난다. (蓄氣가 되면 억지로 行氣를 하지 않아도, 물 이 고이면 저절로 낮은 곳을 향해 흐르듯 氣가 제 길로 흐른다는 견해와 같은 입장으로 보인다. 譯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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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 심장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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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 사트바 구나와 아트만[主人空]은 같지 않으며, 그들로 말미암는 기쁨 또한 같은 것이 아니다. 아트만[主人空]만이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존 재하는 독존자(獨存者)이다. 사트바 구나는 아트만의 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구별을 알고 아트만의 獨存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아 트만을 깨닫게 된다.
일반적인 상태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기쁨은 사트바 구나의 활동에 의한 것이다. 무지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사트바 구나로 말미암는 기쁨과 아트만의 순수한 기쁨을 구별하지 못한다. 사트바 구나의 활동으로 말미암는 기쁨에는, 그 기쁨이 아무리 순수하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에고가 남아 있다.
구나들은 아트만의 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과, 사트바 구나의 기쁨 역시 아트만의 기쁨이 어슴푸레 반영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아트만은 구나들에 종속되지 않으며, 그 안에는 에고의 흔적조차 없다. 아트만과 사트바 구나의 구별을 알고, 아트만의 獨存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는 수행자는 지상의 즐거움을 넘어서서 아트만 자체의 기쁨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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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 그러면 지혜의 빛[照明智]이 비치고, 그로 인해 청각, 촉각, 시각, 미각, 후각의 초능력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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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 지금까지 말한 초능력들은 이 세상에서는 힘이 있으나, 삼매에 이르는 데에는 장애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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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 수행을 통해 카르마의 얽어매는 속박력이 느슨해지면, 수행자는 마음 의 기능과 흐름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갈 수도 있다.
비베카난다는 이렇게 말한다. "요기는 죽은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가 시체를 살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그 동안 자기는 또 다른 몸을 가지고 활동도 한다. 또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가 그의 마음과 육체의 기관들을 통제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육체를 통해 자신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인도 철학의 신기원을 이룬 대철학자이자 성자였던 샹카라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 보자. 샹카라가 아직 십대 소년이었을 때, 인도에는 만단 미스라라고 하는 철학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가장으로써 가장으로서 가정을 책임지는 일이 수도승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런 사상은 당시 인도 전 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샹카라는 만약 미스라가 자기를 설득시키면 미스라의 제자가 되리라고 결심하고, 담판을 벌이기 위해 미스라를 찾아갔다. 샹카라는 자기가 논쟁에서 지면 기꺼이 결혼을 해서 가장이 될 것이고, 만약 미스라가 지면 가정을 버리고 수도승이 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미스라는 샹카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미스라의 부인 바라티가 논쟁의 심판을 맡았다. 바라 티도 유명한 철학자였다.
열띤 논쟁이 여러 날 계속된 결과 바라티는 완전히 손을 들고 말았다. 그때 바라티가 샹카라에게 말했다. "잠시 기다리세요. 남편과 아내는 한 몸입니다. 그대는 지금 우리의 반쪽만을 굴복시켰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저와 토론을 합시다. 나까지 항복시켜야 완전히 승리하는 겁니다. 그대가 거의 모든 철학을 통달했다는 것은 제 남편과의 논쟁을 통해서 이미 입증되었습니다. 하니 이제는 다른 주제를 갖고 얘기해 봅시다. 저는 섹스를 주제로 토론하고 싶습니다. 섹스는 위대한 과학입니다. 그대가 이 토론에서 저를 완전히 굴복시킬 수 있다면 우리 부부는 기꺼이 그대의 제자가 되기로 하지요."
샹카라는 난감했다. 수도승의 신분에 또 섹스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는 소년 샹카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샹카라는 한 달간의 말미를 요청했다. 바라티는 그 요청을 받아 주었다.
그 때 아마라카라고 하는 왕이 죽었다. 샹카라는 자신의 몸을 안전한 곳에 숨기고, 제자들에게 엄중히 지키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요가의 초능력을 사용하여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아마라카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아마라카는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그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샹카라의 뜻에 따라 자신의 왕국을 계속 통치해 나갔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아마라카는 매우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그래서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아마라카의 두 아내는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내 알아차렸다. 아마라카가 청년과 같은 활기를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섹스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나라를 다스리는 일로 샹카라의 마음에는 어두운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구이며 왜 그런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점차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샹카라가 아니라 진짜 아마라카라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샹카라의 제자들이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수도승은 왕궁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유랑 악단으로 변장하고 왕궁으로 들어가 왕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하 무드가람'과 '幻影을 흩어 버리고'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 두 노래는 모두 샹카라 자신이 작사한 것이었다.
"이 세상의 길에 이방인인 자여, 이 세상의 무지에 낯선 자여,
누가 그대의 아내이며, 누가 그대의 아들인가?
그대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여기로 왔는가?
가슴속 깊은 곳에 이런 생각을 품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신께 절하라."
샹카라는 제자들이 부르는 노래에 잠을 깼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샹카라는 아마라카의 몸에서 빠져 나와 자신의 몸으로 되돌아 왔다. 그 순간 아마라카는 다시 죽었다.
얼마 후 샹카라는 미스라의 집을 찾아갔다. 자신도 요가의 초능력을 갖고 있던 미스라의 아내 바라티는 샹카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논쟁을 더 계속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패배를 솔직히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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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우다나(udana)를 통제할 수 있게 되면 물위를 걸을 수 있고 진흙탕 속 에도 빠지지 않는다. 또 가시덤불을 밟아도 찔리지 않으며, 마음대로 몸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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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 사마나(samana)를 통제할 수 있게 되면 몸 주위에 빛나는 불길을 나타 낼 수 있다.
이 두 구절은 생명 에너지인 프라나를 조절함으로써 나타낼 수 있는 초자연적 인 현상에 대한 설명이다. (활동하는 부위에 따라 프라나를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1) 프라나: 심장. 2) 사마나: 복부. 3) 아파나: 골반과 다리. 4) 우다나: 목과 머리. 5) 브야나: 몸 전체. 譯註) 라마크리슈나의 제자 중에 몸에서 빛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빛을 내어 밤길을 가는 라마크리슈나의 길을 비추어 주었다. 그러나 얼마후 라마크리슈나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함으로써 그 제자의 에고가 더 강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61편3-42 쓰기

이 두 구절은 생명 에너지인 프라나를 조절함으로써 나타낼 수 있는 초자연적 인 현상에 대한 설명이다. (활동하는 부위에 따라 프라나를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1) 프라나: 심장. 2) 사마나: 복부. 3) 아파나: 골반과 다리. 4) 우다나: 목과 머리. 5) 브야나: 몸 전체. 譯註) 라마크리슈나의 제자 중에 몸에서 빛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빛을 내어 밤길을 가는 라마크리슈나의 길을 비추어 주었다. 그러나 얼마후 라마크리슈나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함으로써 그 제자의 에고가 더 강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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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 귀와 허공의 관계를 대상으로 總制를 하면 어떤 소리라도 들을 수 있는 天耳通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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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 몸과 허공의 관계를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든지, 또는 가벼운 솜털 같은 것에 마음을 집중하면 공중을 날아다닐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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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각의 흐름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한 결과 마음과 몸이 분리되는 것을 대탈신(大脫身)이라고 한다. 大脫身이 되면 내면의 빛을 가리고 있던 모든 덮개가 벗겨진다.
이 구절은 3-39와 비슷한 내용이지만 서로 다른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3-39에서는 다른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말하고 있는 반면, 여기서는 타마스 구나와 라자스 구나가 얽혀서 만들어진 마음의 덮개가 벗겨지고 사트바 구나의 빛이 밝게 비치는 大脫身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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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 물질의 다섯 원소[五大]와 그 미묘한 본질[五唯], 그리고 그것들의 성격 과 그들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구나들의 상관관계와 구나들이 왜 그렇 게 활동하고 있는가를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물질 원소에 대한 지배 력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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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 그렇게 되면 몸을 원자처럼 작게 응축시킬 수도 있고, 더 이상 물질적 인 요소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완전한 몸으로 만들 수 있다.
이런 경지에 도달한 요기는 자신의 몸을 원자 크기로 축소시킬 수 있는 것은 물론, 산처럼 거대하게 확장시킬 수도 있다. 또 공기처럼 가볍게 할 수도 있고 납덩이처럼 무겁게 할 수도 있다. 손을 불에 넣어도 데지 않고, 물 속을 걸어가도 물에 젖지 않는다. 태풍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서 있을 수도 있다. 요컨대 더 이상 물질의 성질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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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 완전한 몸으로 만든다는 말속에는 아름답고, 우아하고, 힘있고, 깨지지 않는 견고한 육체로 만든다는 뜻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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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 감각 기관의 지각 작용과 지각 능력과 그것에 연결된 에고의식[我想], 그리고 감각 기관을 구성하고 있는 구나들과 구나들의 활동 목적 등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감각 기관에 대한 지배력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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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 감각 기관을 지배할 수 있게 되면 마음이 움직이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몸을 이동시킬 수 있으며, 육체 밖에서 감각 기관을 사용할 수도 있다. 그리고 현상 세계의 자궁인 프라크리티에 대한 지배력이 생긴다.
48절은 인식 작용의 각 단계를 대상으로 하는 總制에 대한 설명이다.
49절에 언급된 것처럼 육체 밖에서 감각 기관을 사용하는 것이 멀리 있는 것을 보는 天眼通과 멀리서 나는 소리를 듣는 天耳通이다. 또 현상 세계의 근원인 프라크리티에 대한 지배력이 생기면 프라크리티의 결과 즉 자연현상을 조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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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 사트바 구나와 아트만의 구별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모든 것을 알 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사트바 구나와 아트만의 구별에 대해서는 3-36에서 설명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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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이 모든 초능력까지도 포기함으로써 장애물의 씨가 소멸되어야 아트만 [主人空]의 唯我獨存 상태에 도달한다.
'장애물의 씨'란 無知를 말한다. 無知로 말미암아 자신이 主人空임을 잊어버리고 개인적인 한 인격체라는 에고의식[我想]이 생긴다. 그리고 에고의식이 있으면 물질적인 소유와 현상 세계를 주무를 수 있는 초능력을 갈망하게 된다. 사실 에고의 관점에서 보면 정신적인 초능력이야말로 최고로 갖고 싶은 것이리라. 물론 파탄잘리가 지금까지 언급한 초능력들은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능력을 얻은 다음에는 다시 그걸 넘어서서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야만 모든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을 받는다. (이러한 해방을 해탈(解脫)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가 신적인 능력을 사용하라는 사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친 것은 이에 대한 좋은 예이다. 譯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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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 비록 높은 경지에 올라간 신령들로부터 유혹을 받더라도 매혹 당하거 나 우쭐대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無知의 굴레를 뒤집어 쓸 위험에 처하게 된다.
'높은 경지에 올라간 신령들'이란 1-19에서 언급된 타락한 수행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신들'의 경지에 도달했으나 집착이 남아 있어서 자연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초능력의 매력에 굴복한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차원을 초월하여 궁극적인 解脫에 이르려는 수행자들을 질투한다. 그래서 자기들 차원으로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요가 수트라의 고전적인 주석가인 브야사는 '높은 경지에 올라간 자들'이 자기들 차원을 넘어가려는 수행자를 유혹하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 앉아서 그대로 쉬지 않겠소? 이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시구려. 그러면 이 하녀가 대단히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요. 이 신비의 영약(靈藥)을 먹으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다오. 이 황금 마차를 타고 그대는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며, 모든 소원을 충족시켜 주는 나무 열매를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을 것이오. 하늘에 흐르는 강물은 그대를 행복에 취하도록 할 것이오. 그곳의 현자들은 이 세상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으며, 선녀들은 우아한 아름다움을 그대에게 선물할 겁니다. 그대의 눈과 귀는 초자연력을 얻을 것이고, 그대의 몸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날 것이오. 우리는 그대를 존경하오. 그대는 이 모든 것을 얻고도 남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소. 당장 이 하늘로 들어오시오. 늙음도 죽음도 없는 신들이 세계가 그대를 부르고 있다오."
브야사는 이런 유혹을 받는 수행자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라고 일러준다.
"나는 무섭게 이글거리는 윤회의 불길에 이미 여러 번 구워진 사람입니다. 나는 태어남과 죽음의 어두운 통로를 이미 수없이 지나쳐 왔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겨우 無知의 그림자를 몰아낼 수 있는 요가의 등불을 발견했습니다. 일단 이 빛을 본 이상, 다시 감각 세계로 들어가 어찌 다시 어둠 속을 헤맬 수 있겠습니까?"
위대한 스승들은 수행자가 영적인 높은 경지에 이르면 예외 없이 외부로부터의 유혹이 따라온다고 가르친다. 유혹은 신들의 차원에 올라간 영적인 존재들로부터 올 수도 있고, 중간 단계쯤 올라간 존재들로부터 올 수도 있다. 또는 땅에 얽매여 있는 세속적인 영[귀신]들로부터 올 수도 있다. 이런 믿음은 힌두교의 예배 양식에 잘 반영되어 있다. 힌두교의 예배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1). 예배자는 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만물 속에 두루 깃들이어 있는 신의 現存을 느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외부로 향한 감각의 문을 잠그고, 신이 거하는 내면의 사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눈을 뜬 자가 자기 앞에 있는 하늘을 보듯이, 영적인 눈이 열린 자들은 언제나 신의 지고한 진리를 본다." 그러면서 자신의 영적인 눈이 이미 열렸다고 상상하면서 만트람을 반복해서 외운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자기가 보는 모든 것 속에 신이 現存하고 있음을 깨닫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리고 만트람의 힘으로 신들의 영역에 올라간 자들이 만들어 놓은 영적인 차원의 장애물이 모두 제거되었다고 믿어야 한다.
2). 그 다음에는 수저로 물을 떠서 허공을 향해 뿌린다. 여기서 허공은 정신 영역을 상징한다. 예배자는 정신적인 차원의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는 힘을 기원하면서 이런 행위를 한다.
3). 마지막으로, 예배자는 오른 손 엄지와 검지로 쌀을 집어서 땅바닥에 원을 그리며 뿌린다. 그때 이렇게 말한다. "주 시바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땅에 매여 있는 영들과 그들이 만들어 놓은 모든 장애물이 사라질지어다." 여기서 '땅에 매여 있는 영들'이란 대부분 자살한 사람들의 영을 가리킨다. 그들은 자신의 카르마를 거부하기 위해 자살했지만, 카르마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카르마에 얽혀 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자는 그들도 그런 속박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해 성숙해 나가기를 기원한다. 때로는 그런 영들을 달래기 위해 음식 공양(供養)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곳을 떠나 는 영들도 있고, 저만치 멀리 떨어져서 예배가 진행되는 과정을 간섭하지 않고 지켜보는 영들도 있다. 힌두교의 예배자들은 이러한 준비 의식을 치른 후에야 자신이 섬기는 신께 예배를 드린다.
어느 시점까지는 영적으로 성숙할수록 유혹도 점점 커진다. 초보자의 단계를 벗어나 신비한 체험이라도 하게 되면 전에 볼 수 없었던 매력이 생긴다.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정신적인 능력을 보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성적인 매력까지도 나타낸다. 감각은 더욱 예민해지고, 더 큰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그리하여 원래의 목적을 잊고, 세속적인 힘이나 성적인 쾌락에 빠질 위험이 더 커진다. 그가 발휘하는 신적인 능력에 현혹되어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아진다. 그러면 신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위험에 빠지질 기회가 많아진다. 그러나 스리 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한다. "브라흐만을 찾는 자는 결코 악에 빠지지 않는다." 누구라도 그런 퇴보의 길을 걸을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구도자라면 이내 돌이켜 원래의 목적지를 향해 다시 전진해야 하리라. 그러면 외적인 현상을 보고 몰려왔던 사람들도 마음을 돌이켜, 함께 깨달음의 길을 가는 길벗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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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 찰나와 찰나의 연속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면 식별지(識別智)를 얻는 다.
'찰나'는 시간의 가장 작은 단위이다. 파탄잘리는 찰나를 강아지나 다이아몬드처럼 외적인 현상 세계에 속한 대상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찰나의 연속은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것은 오직 찰나뿐이다. 그런데 찰나에서 그 다음 찰나로 건너뛰는 과정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 연속적인 과정을 시간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즉 시간이란 상상으로 만들어 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편의상 찰나를 시간의 가장 작은 단위라고 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시간의 단위는 아니다.
한 찰나와 또 찰나에서 찰나로 이어지는 연속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는 수행자는 한 찰나에 우주 전체가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세상이 無常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런 깨달음과 이해를 識別智라고 한다. 識別智를 얻은 수행자는 시간이라는 幻影에서 벗어나, 매 찰나마다 새로운 경험을 하며 살아간다. 어느 한 찰나의 경험은 그 다음 찰나가 되면 새로운 것으로 바뀐다. 그러나 찰나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은 시간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의 지배를 받으면서, 어느 한 찰나의 느낌을 계속 그 다음 찰나로 그 다음 찰나로 가지고 간다. 우리는 흔히 '어제는 하루종일 기분이 울적했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하루종일 울적했던 것이 아니다. 어느 한 찰나, 아니면 몇 찰나에 경험한 울적함을 계속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는 전혀 울적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은 시간이 연속된다는 관념에서 비롯된 상상의 고통이다.
불교의 禪 수행자들은 매 순간 찰나에 집중하는 훈련을 한다. 그런 훈련이 잘된 수행자는 보통 사람이라면 대단한 고통을 느낄 상황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사실 괴로움이란 '지금' 실제로 괴롭기 때문이 아니라, 대개 과거에 받았던 고통에 대한 기억이나 그런 고통이 미래에 또 나타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즉 시간이 연속된다는 망상이 괴로움을 낳는 것이다. 따라서 찰나에서 찰나로 우주가 변하며 돌아간다는 것을 확철히 깨달으면 상상에서 비롯된 괴로움은 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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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 識別智를 얻은 수행자는 종류와 특징과 놓여진 위치로는 도저히 구분 할 수 없는 비슷한 두 사물을 정확히 구별할 수 있다.
육안으로는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은 새 동전 두 개를 번갈아 보여준 다음 손을 뒤로하여 그 동전 두 개를 섞은 다음 다시 보여 주면, 우리는 어느 것이 먼저 본 것이고 어느 것이 나중에 본 것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 하지만 찰나와 찰나의 연속을 대상으로 總制를 행하여 識別智를 얻은 수행자는 정확하게 구별해낸다. 물론 이렇게 구별해 내는 능력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식별 능력이 생기면 아트만과 아트만이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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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 識別智는 구원자이다. 識別智를 통해 매 찰나마다 우주 전체를 동시에 파악하며, 그로 인해 無知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감각 경험에 근거한 앎은 연속성을 갖고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 한가지 한 가지씩 차례로 알아 가는 것이다. 그러나 識別智를 얻은 수행자는 일순간에 전체적으로 대상을 파악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순간적으로 알아차린다. 이러한 앎은 시간에 속한 앎이 아니라 영원에 속한 앎이다. 그래서 무한하다. 識別智는 카르마와 無知의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기 때문에 '구원자'[타라카taraka]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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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 마음이 아트만[主人空]처럼 순수해질 때 완전함이 성취된다. (그리하여 主人空만이 홀로 빛나는 상태가 된다. 譯註)
상대적인 분별심이 사라지고 모든 생각의 흐름이 정지하면 마음은 아트만 자체와 하나가 된다. 스리라마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순수한 마음과 아트만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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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요가의 열매정신적인 초자연력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고, 약초의 힘을 빌려 얻을 수도 있다. 또는 만트라나 고행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 고, 삼매에 듦으로 얻을 수도 있다.
태어날 때부터 초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는 前生에 그런 훈련을 한 결과 이다. 정신적인 초능력 뿐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영적으로 상당히 성숙된 상태로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소위 그런 '선천적인 성자들'은 대단히 신비스럽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신에 대한 사랑과 지혜로 충만하며, 자라는 과정에서도 이 세상의 유혹에 전혀 끄달림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아르쥬나는 이렇게 묻는다.
"믿음은 있으나 마음이 요가의 수행에서 이탈되어 요가의 완성을 얻지 못하는 수행자는 어떤 길을 가게 됩니까?" (바가바드기타 6:37)
스승 크리슈나가 대답한다.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그러한 사람의 멸망이란 있을 수 없다.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악에 정복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가의 길을 가다 이탈한 사람은 공덕을 쌓 은 자들이 가는 세계에 가서 오랜 세월 동안 거기서 살다가 고결하고 존경 받는 집에 다시 태어난다. 아니면, 지혜로운 수행자의 집에 태어난다 ......이렇게 다시 태어는 그는 전생에 지녔던 지혜의 힘을 되살려서, 그 상태로부터 시작하여 완성에 이르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하게 될 것이다. 그는 전생의 수행 덕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수행의 길로 들어선다." (바가바드기타 6: 40-44)
초능력을 나타내게 하는 약초들이 있다. 하지만 약초의 힘으로 초자연적인 경험을 하는 것은 영적인 것은 아니다. 약초의 힘에 의지하다 보면 영적인 메마름과 불신이 생길 수도 있고, 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 파탄잘리는 요가에 관련된 사실을 과학적인 자세로 설명하려니까 약초 얘기를 꺼낸 것이지, 결코 약초에 의한 초자연력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스러운 말이나 만트람을 반복하는 것의 효과에 대해서는 앞에서 자세히 언급했다. 만트람을 반복하는 것은 영적인 성숙을 돕는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이다. 초자연력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특별한 만트람도 있다. 고행은 수행자의 의지를 강철같이 굳세게 해준다. 그리하여 정신적인 초능력을 얻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삼매에 듦으로써 초자연력을 얻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에 대해서는 3장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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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근본질료[프라크리티]의 흐름에 의해 종(種)의 변화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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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선행이나 악행은 種의 변형에 직접 원인이 아니다. 種의 변형이 일어나 는 직접 원인은 근본질료의 흐름이다. 막힌 물꼬를 트면 물이 저절로 논 에 흘러 들어 가고 물꼬를 막으면 다른 데로 흐르는 것처럼, 선행이나 악행은 근본질료의 흐름을 트거나 막는 역할만을 한다.
파탄잘리는 농부가 논에 물을 대는 것을 비유로 種의 진화에 대한 힌두교 이론을 설명하고 있다. 저수지에는 이미 충분한 물이 저장되어 있다. 그렇다고 논에 물을 채우려고 저수지에 가서 물을 퍼오는 사람은 없다. 논에 물을 대려는 농부는 도랑를 파고 물꼬를 터주면 된다. 그러면 물은 저절로 논으로 흘러든다.
이 비유에서 '저수지의 물'은 길만 나면 흐를 준비를 갖추고 있는, 우리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진화의 힘을 가리킨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도랑을 파는 작업이다. 도랑을 파면 물이 논으로 흘러 들어 오고, 그러면 벼가 자라 낱알을 맺는다. 낱알이 맺히면 다음 번 탄생이 이미 결정된 것이다. 이리하여 다음 해 봄이 되면 지난 번 생에서 결정된 결과가 현실로 나타난다. 소위 '種의 변형' 내지 진화는 이렇게 진행된다. 비베카난다는 말한다. "(변형의) 모든 과정과 힘이 이미 각 사람 속에 내재되어 있다. 모든 사람에게 완전함이 깃들어 있다. 다만 그 완전함이 나타나는 통로가 장애물로 막혀 있어서 현실로 나타나지 못하는 것 뿐이다. 따라서 장애물만 제거하면 완전함은 그 즉시 철철 흘러 넘친다." 악한 행위는 악업(惡業)을 낳는다. 악업은 도랑을 막아 저수지의 물을 엉뚱한 곳으로 흐르게 만드는 장애물 역할을 한다. 물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면 홍수가 나 마을을 휩쓸고, 정작 물이 필요한 논에서는 벼가 자라지 못한다. 이렇게 되는 것은 물의 잘못이 아니다. 물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낮은 곳으로 흐를 뿐이기 때문이다. 잘못은 전적으로 물길을 제대로 터 주지 못한 농부에게 있다.
고대 힌두교의 진화론과 현대 서구 과학의 진화론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 비베카난다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 서구인들은 우성교배와 생존경쟁을 통한 적자생존이 진화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잘못된 견해이다. ...... 반면에 파탄잘리는 모든 존재 속에 내재되어 있는 완전함이 진화의 비밀이라고 선언한다. 모든 존재 속에 내재되어 있는 무한자(無限者)는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 생존경쟁이 완 전히 사라진다해도, 모든 존재 속에 내재되어 있는 완전성은 모든 존재가 완전 하게 될 때까지 계속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하려면 생존경쟁이 꼭 필요하다고 믿을 이유가 없다. 동물 속에는 억압된 상태의 인간이 내재되어 있다. 문이 열리는 즉시 그들 속에서 인간들이 튀어나올 것이다. 마찬가 지로 인간 속에는 신이 깃들어 있다. 그런데 신이 나오는 문을 無知라는 장애물 로 막아 놓았기 때문에, 인간은 유한하다는 착각 속에서 괴로움을 당하며 살아 가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의 빛으로 無知를 제거하면 신은 즉시 나타날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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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근원적인 '한마음'에서 여러 가지 마음이 생성되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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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여러 가지 마음으로부터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나지만, 근원적인 '한마 음'이 그 모든 것을 통제한다.
이 두 구절은 한 사람이 여러 가지 마음과 몸을 가질 수 있는 초자연적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몸과 마음이 여럿으로 분화되어도 근본 마음인 한마음이 그 모두를 통제한다. 한마음은 우주적인 자아의식이다. (1-17 참조.) 이 우주적인 자아의식으로부터 수 많은 개인의식이 파생되어 나온다. 같은 원리로 한 사람의 한마음에서도 여러 가지 마음들이 생성되어 한마음 주위를 위성(衛星)처럼 돈다.
이런 이치를 깨달은 요기는, 자신의 카르마를 좀더 빨리 소멸시키기 위해 동시에 여러 개의 마음과 몸을 가지고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초능력 은 얻었지만 진정한 요가의 길에서 이탈한 요기라면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 동시에 여러 개의 몸으로 나툴 수도있다. 하지만 이런 수행이 진정한 깨달음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파탄잘리도 다음 구절에서 이 방법이 별로 가치가 없는 것임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도 참고로 들어둘 만하다. 자신의 몸을 여럿으로 나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왕이 있었다. 그는 여러 개의 몸을 가지고 성적인 쾌락에 탐닉했다. 그러나 결국 "욕정은 결코 만족을 모른다. 타오르고 있는 불 속에 기름을 붓듯이 점점 더 거세게 타오를 뿐이다."라고 말하며 그 짓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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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여러 종류의 마음 중에서 禪定[드야나] 상태에서 생성되는 마음만이 카 르마의 잠재력을 남기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禪定 상태 곧 영적인 깨달음에 들어가야만 카르마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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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요가 수행자의 행위는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행위는 희거나 검거나 희고 검은 것이 섞인 상태이다.
일반 사람들이 짓는 업은 선업이나 악업, 또는 선업과 악업이 뒤섞인 것이다.
그러나 삼매를 성취한 수행자는 어떠한 업도 짓지 않는다. (1-18을 보라.) 그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행하는 행위의 결과는 악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이미 선악의 분별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선할수도 있고 악할수도 있다. 샹카라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의 행위의 결과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선한 영향으로 작용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악한 영향으로 작용한다." 신의 화신(化身)인 아바탈avatar의 경우를 살펴 보자. 크리슈나, 그리스도, 라마크리슈나 같은 이들은 실제로 신의 化身이다. 그들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전생에 지은 업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세상을 지극히 사랑한 나머지 자신들의 신적인 자유의지로 스스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올 때 카르마를 갖고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살면서도 어떤 카르마도 생성 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를 대하는 자신들의 태도 여하에 따라 서로 상이한 영향을 받는다.
힌두교의 종교문헌들 속에는 신이나 신의 化身인 아바탈을 증오하고 대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캄사는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아기 크리슈나를 죽이려고 했다. 쉬슈팔은 크리슈나를 대적하여 싸웠다. 라바나는 라마와 싸웠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바탈들을 대적했던 이들이 모두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 아바탈을 사랑하는 것은 최상의 길이다. 격렬하게 미워하는 것은 그 다음 길이다.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무관심은 가장 나쁜 길이다. 무관심은 최악의 죄이다. 어떤 방향으로든지 움직이는 라자스 구나의 활동성은 침울하고 냉담하게 가라앉아 있는 타마스 구나의 침체성 보다 훨씬 더 영적이다. 라자스 구나의 활동을 통해 사트바 구나의 밝은 차원에 도달할 수 있다. 격렬한 증오를 통해서도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대 힌두교인들은 가룟 유다를 지옥 중에서도 맨 아래 지옥에 쳐박아 놓은 단테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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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7절에서 언급한) 세 종류의 행위로 말미암아 바사나[傾向性, 習氣]가 생 기는데, 생성되어 잠재된 바사나는 적절한 환경을 만나면 현실로 나타 난다.
어떤 환경에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든지, 그 모든 것은 그의 쌓은 카르마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과거에 선한 업을 많이 쌓은 결과 이 생에서 수도승이나 영적인 스승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그에게는 악한 업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를 하려는 경향도 있고, 때로는 좋지 않은 환경 속에 놓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계속 유지하고 스승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한 삶을 살아나간다면, 나쁜 傾向性은 그 활동이 정지되고 좋은 傾向性만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환경은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환경에 따라 어떤 傾向性은 활동이 정지되고 어떤 傾向性은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만약 개로 태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개로 태어 났어도 과거에 형성된 傾向性은 그대로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 중에는 선한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라는 한정된 상황 때문에 그러한 傾向性이 현실화 되 는 것이 제한받을 것이다. 그리고 개의 본성에 따라 행동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전 장들에서는 '삼스카라'를 '어떻게 하려는 傾向性' 또는 '潛在印象'이 라고 번역했다. 바사나와 삼스카라는 같은 것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일컫는 말 이다. 예를 들어 여러 가지 곡식으로 밥을 지으면 잡곡밥이 된다. 이 경우 '잡곡밥'은 '삼스카라'에 해당하고, 잡곡밥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곡식'은 '바사나'에 해당된다고 보면 좋을 듯 싶다. 譯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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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과거에 쌓인 潛在印象들은 깊은 기억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이 바뀌고 다른 種으로 태어나도 원인과 결과 의 사슬은 끊어지 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깊은 기억'이란 意識 수준의 기억이 아니라 意識下意識 수준의 기억을 말한다. 意識下意識 속에는 과거에 받았던 모든 인상들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그리고 이 생에서의 생각과 행동들도 그 기억에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으며, 또 계속 연결되어 간다. 인과의 사슬인 카르마는 태고적 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수없는 輪廻轉生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몸을 입고 태어난다. 동물에서 인간으로, 또 인간에서 인간이 아닌 다 른 어떤 것으로 태어난 과정이 되풀이 된다. 이렇게 몸을 바꾸어 가며 태어나는 장구한 과정 속에서도 카르마의 사슬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작용한다. 단지 앞 구절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가 처한 상황에 따라 어떤 傾向性은 활동이 정지되고 어떤 傾向性은 현실로 나타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활동이 정지된 傾向性들도 장래에 다른 種으로 태어난다든지 하여 적절한 상황을 만나면 다시 활동을 시작하여 현실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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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생존의지는 시작도 끝도 없이 항상 존재한다. 따라서 잠재적인 傾向性 이 쌓이기 시작한 출발점도 없다.
창조와 해체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과정이다. 카르마의 힘이 영원히 작용하면서 끊임없이 潛在印象을 만들어 나간다. 이런 과정이 시작된 최초의 행동은 없다. 이게 힌두 철학의 우주관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뿐이다. 즉 현상세계 차원에 생존하려는 욕구를 버림으로써 카르마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길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본성인 아트만[主人空]과 하나 되는 것만이 자유를 얻는 유일한 길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다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아트만과 합일되면 우주는 사라진단 말인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시간이라는 한계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은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가 없다. 사실은 질문 자체가 잘못 되었다. 질문에서 말하는 '우주'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속의 존재인 반면아트만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현재'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초월한 존재와 시간속의 존재를 동일 선상에 놓고 왈가왈부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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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잠재된 傾向性은 어떤 원인과 그에 대한 결과 때문에 생긴 것이며, 마 음 속에 의지할 수 있는 근거가 있으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외 부의 감각 대상에 의해 자극을 받아 활성화 한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 과와, 의지하는 근거와 자극하는 대상이 제거되면 저절로 없어진다.
카르마는 어떤 원인이 있어냐만 활동을 하고 傾向性을 생성시킨다. 2-3에 언급된 無知, 에고의식[我想], 집착하는 마음, 증오심, 그리고 목숨에 대한 애착 이 카르마를 활동하도고 만드는 원인들이다. 그리고 그런 원인들로 인해 카르마가 활동한 결과는 2-13에 언급된 것처럼 환생 (還生), 수명의 길고 짧음, 즐거운 경험과 고통스러운 경험 등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카르마는 아트만에 대한 無知에 뿌리를 내리고 괴로움이라는 결과는 낳는 것이다. 따라서 無知를 제거하면 카르마는 저절로 파괴된다.
<스베타스바타라 우파니샤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 광대한 우주는 생명체들이 輪廻轉生하는 수레바퀴이다. 이 윤회의 수레바퀴는 끝없이 돌고 있다. 자기를 브라흐만과 떨어진 별도의 존재로 보는 한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그러나 브라흐만의 은혜로 자신과 브라흐만이 하나임을 깨달으면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불멸성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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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과거의 형태와 미래의 형태는 객관적인 대상 속에 실제로 존재하며, 모 든 형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추이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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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시간의 추이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형태는) 그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구나들의 속성에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형태를 취할 수도 있고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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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 어떤 형태로 변하든지 모두 그 속에서 활동하는 구나의 轉變에 의한 것 이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현상은 근본적으로 동질성을 갖고 있다.
<바가바드 기타>는 이렇게 말한다. "非存在는 결코 존재가 되어 나올 수 없고,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객관적인 대상으로써의 사물은 그 형태와 표현을 계속 바꾼다. 그러나 아무리 형태와 모양을 바꾸어도, 현재의 형태 속에 과거의 형태와 미래에 나타날 형태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형태로)잠재되어 있다. 즉 과거와 미래의 형태가 실존하고 있으며, 우주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모든 대상은 세 가지 구나의 복합체이다. 구나들의 활동과 결합에 의해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물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육체의 감각기관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미묘한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다. 형태의 변화는 세 구나의 상호관계의 변화에 따라 생긴다. 예를 들어 사트바 구나가 지배적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그 자리를 라자스 구나가 차지하게 되면 전혀 다른 형태로 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구나 중 어느 하나도 사라지는 법이 없이 모두 그대로 대상 안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형태는 변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저런 몸을 입고 윤회를 거듭해도 마음의 동질성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동일한 마음이 어떤 때는 악한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날 수도 있고, 또 다른 때는 선한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날 수도 있다. 악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경우에는 과거에 쌓은 선한 기질이 잠재상태로 존재하고, 선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경우에는 악한 기질이 잠재된다. 존재 형태만 바뀔 뿐 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현재 상태 속에는 과거의 열매와 미래의 가능성이 現存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벗어나서 해탈할 수 있을까? 파탄잘리는 이미 이 질문에 대해 서 여러 차례 대답했다. 바로 앞 11절에서도 그는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意識下意識 속에 잠재된 傾向性은 마음 속에 의지할 근거가 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재된 傾向性이 의지하고 있는 마음이 없어지면 잠재된 傾向性도 저절로 없어진다. 잠재된 傾向性 또는 카르마가 의지하고 있는 마음을 없애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즉 에고의식이 생각하는 '내 마음'과 主人空인 '참 나의 한마음'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길 밖에 없다. 이 깨달음을 얻으면 카르마의 사슬에서 풀려나 해탈에 이른다.
해탈에 이르러도 마음 속에는 과거의 潛在印象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보통처럼 객관적인 실체로 現存하는 것이 아니라, 불에 탄 씨앗처럼 모든 활동성이 소멸된 상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활동성이 소멸되었는 것은 미분화 상태의 근본질료인 프라크리티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는 말이지 아주 사라져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깨달은 사람은 현재와 미래를 과거 속으로 돌려 넣는다." 여기서 '과거'란 최초의 근원, 즉 만물의 자궁인 프라크리티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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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똑 같은 대상이라도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서로 다르게 보인다. 그 러므로 마음과 대상은 각자 자신의 독자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고 보 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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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대상은 마음에 의존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마음이 있 음으로써 대상이 존재한다면, 마음이 대상을 認知하지 못하면 대상이 존 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파탄잘리는 이 두 구절에서 주관적 관념론을 배격하고 있다. 파탄잘리는 객관적인 대상과 그것을 認知하는 마음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샹키야의 견해에 동의한다. 주석가들은 이에 대한 설명으로 아름다운 여인의 경우를 예로 든다. 남편은 아름다운 자기 아내를 보고 기쁨을 얻는다. 그러나 다른 여자들은 질투를 하며, 욕정이 있는 사람은 정욕의 불길을 일으킨다. 그런가 하면 자기를 엄격히 통제하는 사람은 나무토막을 바라보듯 그저 무덤덤하게 본다. 그렇다면 이들 중 누가 본 모습이 그 여인의 진실된 모습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누가 본 것도 그 여인의 진실된 모습이 아니다.'이다. 왜냐하면 '대상-그 자체'는 감각경험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1-43 참조. '감각경험' 속에는 감각에 근거한 마음작용까지도 포함된다. 譯註) 따라서 마음과 대상은 각자 독자적인 차원을 차지하고 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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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 대상은 (같은 사물이라도) 마음의 분위기에 따라 인식되기도 하고 인식 되지 않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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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 마음의 주재자인 아트만[主人空]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흐름은 主人空에게 항상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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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마음은 '主人空의 인식대상'[또는 '主人空의 인식도구']이기 때문에 자 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마음이 주관적으로 무엇을 인식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無知에서 비롯된 착각이다. 파탄잘리의 견해에 따르면, 마음은 인식주체가 아니라 인식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눈이 무엇을 본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다. 눈은 마음이 무엇을 보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야에는 들어오고 있지만 마음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볼 수 있을 뿐 보고자 하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또 보는 능력을 갖고 있는 마음은 눈을 통하지 않고도 볼 수 있다. 눈을 감고 자는 동안에도 꿈 속에서 무엇을 보는 것도 그 한 예이다. 그러나 마음이 보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비유일뿐, 마음이 실제로 보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보는 능력은 主人空의 보는 능력이 반영된 것이지 마음 자체의 능력이 아니다. 譯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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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 마음의 흐름은 외부로 향할 수도 있고 내면으로 향할 수도 있다. 그러 나 동시에 두 방향으로 흐르지는 못한다.
이 책 첫머리(1-2)에서 보았듯이, 마음은 '보는 자'가 아니라 '보는 자'인 아트만[主人空]이 보는 데 사용하는 '도구'이다. 마음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러므로 인식 주체가 될 수 없다. 변하는 것은 인식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비베카난다는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열차를 예로 든다.
"(흔들림이 없다고 가정 했을때) 두 열차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그 열차에 타고 옆에 있는 열차를 보고 있는 사람은 열차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열차가 움직이는 것을 알려면 어느 한 쪽이 움직이지 않고 있어야 한다. ...... 마찬가지로 결코 변하지 않는 자리에 들어가야만 일체의 앎이 완전해 진다." 아트만[主人空]만이 홀로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트만만이 모든 인식의 표준으로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판단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 항상 변하는 마음은, 비베카난다의 비유에 따르면 움직이는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과 같아서 인식과 판단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은 主人空의 인식대상이면서 동시에 외적인 세계의 사물을 인식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마음 자체에 인식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마음은 태양처럼 빛을 비추는 존재가 아니라 달처럼 태양빛을 반사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인식능력은 인식 주체인 主人空에게 있다.
만약 마음이 인식 주체로서 스스로 인식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자기 자신과 외적인 대상을 함께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마음이 외적인 대상을 향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방향을 내면으로 돌려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동안에는 외적이 대상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보아도 마음이 인식 주체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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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 만약 자신의 마음을 인식할 수 있다면, 자신의 마음을 인식하는 제 2의 마음이 있어야만 그런 일이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제 2의 마음을 인식 하는 제 3의 마음도 있어야 되고, 결국은 무한히 많은 마음이 필요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기억에 대혼란이 일어난다.
마음을 인식하는 주체인 主人空을 부정하면 필연적으로 이런 혼란에 빠진다. 아주 쉬운 이야기이다. '내가 내 마음을 안다'고 말하려면 내 마음을 아는 주체로서의 제 2의 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제 2의 내가 내 마음을 안다는 것을 알려면 제 3의 내가 또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끝없이 많는 내가 있어야 된다. 이것은 마치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서 어디에 비치는 모습이 자기 모습인 지를 찾고자 하는것과 다를 바 없다. 더 나아가 '나'라고 하는 '마음' 속에는 기억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나를 상정한다면 기억에 일대 혼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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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 아트만[主人空]의 순수의식은 변하지 않는다. 마음은 아트만의 순수의 식의 빛을 받아 반사한다. 아트만의 빛을 반사하는 동안에는 마음이 마 치 의식의 주체인 것처럼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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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 마음은 자기 속에 아트만의 빛과 대상이 동시에 비쳐야만 대상을 인식 할 수 있다.
마음은 외적인 대상과 아트만 사이에 있는 중간 존재이다. 마음이 대상을 인식하는 힘은, 달이 태양빛을 반사하는 것처럼 아트만의 인식능력을 빌어 반사하는 것이다. 완전히 깜깜한 방에서는 거울 속에 아무런 영상도 비치지 않는다. 그러나 불이 켜지면 그 즉시 영상이 비친다. 물론 방에 아무 것도 없다면 아무런 영상도 생기지 않는다. 여기에서 거울은 마음이고 빛은 아트만이며 거울 속에 영상이 비치는 것은 마음의 인식작용이다. 빛과 거울 만으로도 영상은 생기지 않으며, 거울과 대상만으로도 영상은 생기지 않는다. 거울 속에 영상이 생기려면 빛과 거울과 대상이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인식작용을 하려면 아트만의 빛과 대상이 동시에 비쳐져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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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 마음은 수많은 潛在印象과 욕구를 가지고 여러 가지 형태로 바뀌어 나 타나지만, 이 모든 것이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主人空을 위해서 그 렇게 되는 것이다. 마음은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복합체이기 때문에 스스로 활동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개체 또는 다양한 힘이 모여서 이루어진 복합체는 그렇게 복합체가 된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은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인을 위한 목적이다. 법률을 제정하고 국정을 심의하는 국회는 주인인 국민을 위해 구성된 복합체이다. 만약 국민을 위해서라는 목적이 없다면, 국회는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을 한 방에 모아놓은데 지나지 않는다. 또 좋은 가구들로 잘 꾸며진 집이라는 복합체는 주인을 위해서 그렇게 존재한다. 만약 주인이 들어와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자재로 집을 짓고 화려한 가구들로 집안을 꽉채워 놓았다고해도 뜻이 없다. 국회의원들이 모인 국회나 여러가지 가구들로 꾸며진 집이나, 다양한 개체들이 모여 이루어진 복합체는 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을 위해서 그런 복합체를 이루게 된 것이다. 국회가 국회 자체를 위하는 목적으로 성립 된 것이 아니고, 집이 집 자체를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다. 또 여러가 지 부품들로 이루어진 자동차가 자동차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고 굴러 다니는 것 이 아니다. 모든 복합체는 이렇듯 자기 자신이 아닌, 주인을 위한 목적을 가지 고 존재하고 활동한다. 마음도 여러가지가 뒤섞여 작용하는 복합체이다. 따라서 복합체인 마음도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그 무엇[主人空]을 위해서 존 재하고 활동하는 것이다. 만약 마음에 목적이 없다면 목적이 없는 국회처럼 온 갖 욕망이 아우성치는 아수라장일 뿐이고, 주인이 없다면 빈 집의 가구들 처럼 아무 의미도 없는 것들의 집합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마음은 주인인 主人空의 뜻을 위해서 존재하고 활동한다고 밖에는 달리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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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 아트만[主人空]과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알면 에고의식[我想]에서 벗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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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 마음의 흐름이 아트만과 마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식별하는 쪽으로 향하면, '보는 자'인 主人空의 보는 힘만이 獨存하는 상태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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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과거에 쌓인 잠재력[삼스카라]에 의해 그러한 마음도 가끔 산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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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 그런 산만함은 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과 똑같은 방 법으로 극복할 수 있다.
깨달음에 이르는 장애물은 마음을 그 근원[최초의 원인]으로 되돌려 놓거나, 禪定을 통해 삼매에 듦으로써 제거된다. 이에 대해서는 2장 10절과 11절에서 설명했다. 스리 라마크리슈나는 이런 아름다운 비유를 말한다. "날씨가 더우면 계속 부채질을 해야한다. 하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 더 이상 부채질을 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얻으면 은총의 산들바람이 항상 불어오기 때문에, 더 이상 부채질 즉 식별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훈련을 계속할 필요가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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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모든 초자연력을 얻었어도 그런 것들로부터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완 전한 식별 상태에 머문다. 이런 상태를 '법운삼매'(法雲三昧)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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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 法雲三昧 상태에 이르면 괴로움의 근원인 無知가 소멸되고 카르마의 힘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法雲은 산스크리트어 '다르마-메그하'dharma-megha의 번역으로 '진리의 구름'이라는 뜻이다. 譯註)
초자연력을 얻게 되면 그것을 현상세계에서 사용하고싶은 위험한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유혹에 굴하지 않고 깨달음의 상태만을 추구하면, 구름에서 비가 내리듯이 진리의 구름[法雲]에서 자유와 기쁨의 비가 쏟아져 내린다. 이런 상태를 法雲三昧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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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이리하여 무한한 지혜 속에 들어가면 無知와 불순함 때문에 보이지 않 던 우주의 비밀이 밝혀진다.
감각 경험을 통해 앎을 얻는 사람에게는 우주는 온통 비밀에 싸여 있다. 알아도 알아도 또 더 알아야 할 것이 남아 있다. 아는 것에 비하면 모르는 것은 무한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사물이 새로 알아야 할 대상이다. 인간의 과학적인 탐구는 어린애가 숟가락으로 바닷물을 퍼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무리 퍼내도 바닷물은 줄지 않고 그대로 있다. 우리는 이렇듯 無知로 뒤덮여 있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에게는 우주가 베일에 싸인 신비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우주의 근원을 앎으로써 우주 전체를 알았기 때문이다. 진흙의 본성 을 알면 진흙을 빚어 만든 그릇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든지 그 본성을 안다. 마찬가지로 主人空을 아는 사람은 主人空의 나툼인 우주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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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 그러면 구나들의 轉變이 끝난다. 자신들의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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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 찰나에서 찰나로 이어지는 구나들의 轉變은 그 변화가 끝난 자리에서 만 파악이 가능하다. (움직이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움직이지 않는 자 리에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4-20의 해설 참조. 譯註)
구나들이 轉變하면서 우주를 전개시켜 나가는 것은 '보는 자'인 主人空이 그것을 보고 해탈에 이르고자 함이다 (2-18을 보라). 그러므로 해탈에 이르면 구나들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구나들의 轉變은 이 찰나에서 저 찰나로 건너 뛰는 순간에 일어난다. 찰나와 찰나는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단절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연결된 것으로 여기고 찰나의 연속을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찰나에 일어나는 轉變을 감지하지 못하고,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변화가 있었음을 안다. 꽃이 필 때 찰나 찰나 꽃잎이 벌어지지만 우리는 어느 한 찰나의 변화를 알지 못한다. 다만 시간이 꽤 흐른 다음에야 꽃봉오리가 꽃으로 피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마음 속에서 흐르는 생각의 흐름도 마찬가지이다. 생각의 흐름도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찰나찰나 변하며 이어지는데, 우리는 어느 한 찰나의 생각의 변화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느 정도 시간 흐른 다음에 그 생각이 어떤 결정이나 관념을 형성한 다음에야 생각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는 시간이 실재하지 않는다. 그의 생각은 시간이라는 흐름을 타고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찰나찰나 끊어진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소위 '사고방식'이라는 것이 없다. 그에게는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고 있는 한 찰나, 곧 '영원한 현재' 밖에 없다 (3-53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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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 아트만[主人空]을 위한 임무를 완수한 구나들은 만물의 자궁인 프라크 리티 속으로 녹아들어 간다. 이것이 해탈이다. 여기에 이르면 아트만[主 人空]의 본성인 순수의식만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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